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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r 20. 2018

잔인한 여자의 일생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소녀에서부터 할머니가 되기 까지 그녀의 일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프랑스 노르망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순수소녀 잔느는 손님으로 찾아온 남작 줄리앙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그녀가 바라오던 환상을 그대로 확신으로 착각한채 이유없는 사랑을 시작한다. 소녀의 사랑은 찬란했다. 함께 숲길을 거닐고, 잔잔한 호수를 둘이 함께 내려다보며 미래를 속삭이면 더 없이 행복하리라 믿었다. 의심없이 시작한 사랑, 그리고 이어진 결혼. 그러나 환상이 실제가 될 수 없듯이 잔느의 현실은 생각만큼 반짝반짝하지 않았다. 

난폭하고 교양 없고 어리석고 동물적인 남편은 결혼 후 실체를 드러낸다. 잔느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하녀 로잘리가 줄리앙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것이 바람기 많은 남편의 실체였다. 게다가 남편은 결혼 전부터 하녀와 관계를 맺어왔다. 그럼에도 뉘우치기는커녕 곧바로 이웃 백작부인과 또 다시 불륜관계에 빠진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런 남편을 용서하라는 주변의 강요이다. 신부는 잔느의 아픔을 종교적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구원은 용서에 있다”면서. 친정엄마마저 용서를 종용한다. 믿었던 남편의 추악한 모습을 목도한 딸에게 구원받기 위한 용서가 과연 적절한 위로였을까.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사진) 내용이다. 이 소설은 원제목이 ‘한 인생(Une Vie)’이다. 영미권에 번역되면서 제목에 '여자'라는 단어가 덧붙었다. 여자 주인공의 불행한 삶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테다. 꼭 여자여서가 아닌, 누구나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잔느처럼 핏기없이 주름져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보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용기있는 고백에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혼자 감내해 왔을 고통에 가슴이 저리기도 하다. 잔느의 엄마나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해댔을 것이다. 증거도, 증인도 마땅치 않은 이 일을 홀로 어떻게 싸워나가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가해자들은 하나 같이 알량한 권력을 가진 그들 세계에서 '갑'의 위치였다. '갑' 앞에서 '을'은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도 왜 가만 있었느냐?” “오래 전 일을 왜 이제와서 우르르 들고 일어나느냐?” 반문한다. 피해자들은 가만 있고 싶어서 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주변 동료, 선후배들을 짓밟고도 당당한 '갑'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이 커져갔을 것이다. 한 사람의 고백은 그저 외침에 불과하지만,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모이면 그것이 여론이 된다. 이제라도 여론이 모인 것에 안도한다.  

<여자의 일생>을 읽은 대다수 사람이 잔느의 삶을 불행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잔느의 삶만 특별히 불행해보이지 않는다. 잔느가 삶아온 삶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불행을 바로잡을 기회가 곳곳에 있었다. 잔느는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릴 뿐, 한 번도 운명에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앙에게 겁탈당하고 아이까지 낳아 쫓겨난 하녀는 달랐다. 하녀는 자기 인생을 살았고 지켜냈다. 어린시절 주인집 아가씨인 잔느를 한 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지만, 두 여자의 마지막은 각자 삶의 의지대로 극명하게 갈렸다.  

혹심한 시련을 몇 차례 겪어도 잔느는 다시금 기운을 차리며, 새로운 희망과 애정의 대상을 찾는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담담하게 다가온다. 용기있게 ME TOO를 고백한 사람들 역시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더욱 당당해지길 바라며, 그들의 앞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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