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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방랑가 박준. 뉴욕타임즈에 소개된 사진가

그는 오늘도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선다

by 끌로이

고독한 방랑가 박준. 그는 오늘도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선다.


언뜻 보면 중동 사막 같기도, 또 아프리카 오지 같기도 하다. 그가 찍어온 사진들은 늘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아득한 먼 곳처럼 보인다. 여기서 반전은 그는 40년 동안 '미국'의 풍경만을 남겨왔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미국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사진은 원초적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 바람이 만든 산을 카메라에 기록하며 고요한 황무지와 마음으로 대화하는 고독한 방랑가 박준이다.


그는 오래전, 생선을 찍어서 <뉴욕타임스>에도 소개된 유명한 사진작가다. 그러나 '사진작가 박준'이라 칭하자 그는 곧바로 손사래를 친다. 정작 본인은 작가가 아닌 그냥 사진가라고 정정했다. 조각하는 사람을 조각가, 곡 만드는 사람을 음악가라 부르는데 굳이 사진을 만드는 사람에게만 작가라는 호칭이 붙는데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고집스러운 철학으로 외길을 걸어온 사진가 박준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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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아날로그' 감성 그대로

굳이 작품 아래 새겨진 사진가의 서명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사진에는 고유의 결이 있다. 혼과 자연이 만나는 순간을 거칠고 대담하게 흑백 필름카메라로 담아낸 것이 그렇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캠벨 수프 통조림을 보고 앤디 워홀을 떠올리듯이 그의 작품에도 박준 특유의 느낌이 있다. 컬러와 디지털이 주를 이루고 있는 2019년 현재, 그의 사진은 여전히 흑백이다. 뿐만 아니라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한다.


그라고 왜 여느 사진가들처럼 보다 사실적이고 선명한 색감 표현에 대한 열망이 없었을까. 대자연의 신비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그러다 이내 흑백 사진으로 인화하고 만다. 흑과 백, 단순한 조합으로 노출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손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컬러 사진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충실하다면 흑백사진은 작가가 개입할 여지가 팔 할이다. 흑백사진은 만드는 재미가 있다고 표현할만하다.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인화하는 그 간편한 과정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심지어 렌즈가 사람의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해 알아서 다양한 색감으로 척척 찍어주는 디지털 시대. 어쩌면 그는 정반대에 서 있다. 그는 암실에서 맨손을 화학약품에 담그며 사진을 만든다. 그러는 사이 그의 손끝은 노랗게 변하고 썩어 들어가 손톱이 빠진 것만 여러 번이다. 여기에 대해 박준은 “작가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자신만의 생각과 방법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필히 손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은 손이 거칠수록 작업의 완성도도 훌륭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직접 손에 느껴지는 약품의 질감과 냄새야말로 작업 과정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는 장갑이나 집게를 쓰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진부해 보이죠. 작업도, 사진도. 분명 어렵고 힘든 과정이지만 그 자체가 매력적이죠. 만지는 맛이 있잖아요."



이제 그만 디지털 인화기를 들여놓지 않겠느냐 권유하자 박준이 한 대답이다.




관람객의 느낌대로 해석하는 사진

박준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애리조나 사막', '캘리포니아 어딘가' 이렇게 사진 구분을 위한 짤막한 글뿐이다. 여기에도 그만의 올곧은 강단이 엿보인다. 그는 관람객이 사진을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둔다. 전시장에서 사진을 보고 저마다 느낀 점을 솔직하게 풀어내는 과정을 즐긴다. 같은 사막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은 평온함을, 어떤 사람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사진가는 재료를 던져주는 역할을 할 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철저히 관람객의 몫이다.


이토록 친근한 사진가가 어디 있을까. 그는 사진을 반드시 화랑에만 전시하지 않는다. 한 번은 도서관에 그의 사진 십여 점만 세워놓고 전시한 적이 있다. 변호사 사무실이나 병원에서 전시한 적도 있다. 어디에 사진이 걸리느냐 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진을 봐주느냐가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문턱을 낮춘 그의 전시 철학은 망연스럽게 사진가 박준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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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그에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005년, 박준의 독창적인 사진이야기를 문화면에 보도했다. 이로서 세계 제일의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온 늦깎이 사진가는 어떻게 세계에서 인정받는 예술가가 됐을까? 한국에서 태어나 20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보냈다. 그러다 <위대한 게츠비> 영화 속 '로버트 레드포드' 모습에 반해 막연히 뉴욕길에 오른다. 그때가 1983년이다. 이민이라는 단어조차 흔하지 않던 시절, 그는 뉴욕의 까만 머리 이방인이었다. 말이 자유롭지 않아 어디를 가나 고립된 섬에 갇힌 듯 외로웠고, 이름 없는 사진가로서의 삶은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그때 미국의 자연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작품을 핑계로 무작정 자연에 뛰어들어 뉴욕에서 캘리포니아 끝자락까지 미국대륙을 횡단하기만 수십 차례. 처음에는 분명 작품을 위한 명분이었지만 어느새 중독된 여정이 되었다. 1997년 첫 전시회를 연 후부터 자연을 프레임에 담기 시작해 캘리포니아 데스밸리를 사십 번 이상 다녀왔고, 뉴욕에서 LA까지 크로스컨트리 여행을 열 번 넘게 했다. 환갑이 넘은 현재까지 일 년에 두어 번씩 작은 자동차로 미국 전역을 누빈다.



"사막을 다니다보면 낮 온도가 섭씨 50도까지 오르기도 하고, 갑작스런 모래 바람이 살을 할퀴기도 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생활에 중독돼 가고 있는 것 같다. 힘들면 그만할 법도 한데 그만두고 싶지가 않다.”



사막에서 몇 달씩 생활하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몇달 동안 차 옆에 텐트를 쳐놓고 생활한다. 씻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것도 작은 냄비에 즉석식품을 데워먹는 정도다. 그런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그는 여정을 즐긴다. 마음을 채우는 아찔한 매력이 있어서다. 그에게 미국은 혹독한 차별을 경험하게 한 곳임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 애증의 땅이다.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아웃사이더

박준 사진가는 스스로를 물에 섞이지 못한 기름이었다고 표현한다. 그의 정체성은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맨해튼 방향으로 찍은 한 그루의 나무 사진. 앙상한 나무 너머로 당당하게 뻗어있는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한 겨울 헐벗은 나무 모습이 마치 박준 자신과 같다. 그는 늘 이방인, 아웃사이더라는 열등감을 갖고 살아왔다.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아웃사이더에 대한 열등감은 그의 생활 모든 부분에서 그를 지배했다. 자연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 또한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본인의 한계를 깨닫고 도피처로 자연을 택했기 때문이다. 욕망과 열정이 한데 뒤엉킨 뜨거운 도시 맨해튼을 처량하게 바라만 보는 자신의 모습이 철학적으로 읽힌다. 여기에는 슬픔과 분노, 안타까움, 질투 등 원초적인 본능이 모두 녹아있다.


성조기 위에 생선 네 마리를 배치한 작품이 인상적이다. 예전에 수족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물고기들이 종류별로 무리지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아웃사이더로서 무리에 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진 속 물고기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 중 유독 한 마리만 반대편을 향하고 있다. 그는 그 한마리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혼자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박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언제나 걸작은 극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다 했던가.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게 화려하거나 완벽한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그의 사진에서는 한겨울에 피운 한 송이 동백꽃 같은 절절함이 묻어난다.


백인 주류가 아님에 한동안 좌절했다. 누구를 향해 분노해야 할지도 모른 채 사막을 방황했다. 치열한 정글과 같은 뉴욕의 예술판을 이제 그만 떠나고 싶기도 했다. 이런저런 부침을 겪은 후, 이제 그는 '미국을 탐험하는 뉴욕의 이방인'이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성공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뉴욕을 즐기자 더욱 편안해졌다. 박준은 처음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때부터 30년이 넘도록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낡고 좁은 스튜디오가 박준 부부의 보금자리다. 넓은 새집으로 이사 갈 계획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미술계는 어찌 보면 로또와 같다. 선택받은 한두 명 만이 살아남아 인정받는다. 그 외의 수많은 예술가는 들러리로 전락한다. 나도 예전에는 성공에 목말라 스트레스 받았지만, 이제는 과정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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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한국에서 개인전 예정

지난해 뉴저지 리버사이드 화랑에서 'America the Beautiful'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올 가을에는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동안 전국을 돌며 찍어온 사진 작품들이 수십만 장이다. 이제 그만 소장품들로 전시를 기획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는 오늘도 새로운 미국 속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난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이다. 줄곧 가난한 사진가의 아내로 생계를 책임져온 그의 아내가 몇 년 전부터 사진 만드는 여정에 함께하고 있다.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던 고독한 여정이 부부의 낭만 여행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그는 즐기며, 느끼며, 생각하며 사진을 만들어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그렇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그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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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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