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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n 06. 2019

빈민가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이야기에 빠져든다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빈민가 소녀들의 사랑과 우정이야기에 빠져든다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Vedi Napoli e poi muori)” 이탈리아 속담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 음악과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도시. 이탈리아 중에서도 나폴리는 그런 곳이다. 나폴리하면 푸른 쪽빛 바다에서 헤엄치며 여유롭게 칵테일을 마시는 풍경이 연상된다. 나폴리는 그렇게 한낮에도 환한 빛을 발하는 환상의 휴양지 이미지가 강하다.  


『나폴리 4부작』은 폭력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격렬하게 빛나는 릴라와 레누라는 두 소녀가 주인공이다. 엘레나 페란테 작가는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고향 나폴리를 소설 배경으로 끌어와 60년에 걸친 소녀의 우정을 소설로 완성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탁월한 점은 두 주인공의 삶과 우정, 사랑이 당시 시대적 상황과 매끄럽게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흔히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하면 사랑과 낭만을 기대하기 쉬운데, 이 소설은 아름답고 찬란한 나폴리에서 펼쳐지는 인생의 곡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정과 견제를 담은 한 편의 성장기, 또는 대하소설이라 부를만하다. 유난히 대비적인 요소가 눈에 많이 띄는데 나폴리의 눈부심과 시대적 암울함, 소녀의 사랑과 배신, 남성과 여성, 부와 가난, 파시스트와 좌파, 폭력과 저항 등이 고루 녹아 쉴 새 없이 휘몰아친다.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볼까?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주인공 릴라와 레누의 유년기,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청년기,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장년기를 따라 흐른다. 둘 다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결혼·불륜·이혼·출산·육아를 힘들게 헤쳐 나간다. 이야기는 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릴라는 자신의 컴퓨터와 옷가지는 물론 사진에서 자신의 얼굴을 몽땅 도려내고 증발한다. 이 증발 미스터리가 4권을 정주행하게 하는 힘이다.  


작품의 시공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나폴리의 빈민가다. 주민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에 신음한다. 가난한 와중에 살인과 폭행, 성폭행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다. 릴라가 천재형에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안하무인 스타일이라면, 레누는 노력형에 모범생이고 주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다듬을 줄 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 서로 다른 길을 택하면서 서로에 대한 동경과 질투, 견제와 경쟁도 심해진다. 친구가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기도 한다. 둘의 우정은 '흔들림 없이 친한' 종류의 우정이 아니라 멀어지고 가까워지길 수없이 반복하면서 징하게 얽히는 종류의 우정이다.   


릴라는 고향 나폴리에 남아 어려움을 딛고 존경받는 사업가로 성장한다. 레누는 고향을 떠나 결혼을 하고 소설을 출간한다. 겉으로는 성공해 보이지만 레누는 따분한 집안일과 결혼생활이 숨막힌다. 싱글로서 정치 모임에 참가하고 여성운동을 하는 자신의 시누이를 질투하며 늘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꾼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삶을 개척해갔던 두 소녀는 66살의 할머니가 되어 나폴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결국 어떻게 끝났을까? 방황하던 레누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찾는다. 레누는 문학적 명성을 얻고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버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 니노와 일 년 반 동안 함께 산다. 막장극 같은 드라마적 요소가 극에 달한 대목이다. 여기에 가슴 저릿하게 하는 짠한 사랑이야기가 세련되게 녹아있어 미국에서는 이 소설을 마치 '마약 같다'고 표현했다. 레누의 개인적인 삶과 1990년대 이탈리아의 적폐청산 시기가 겹쳐지면서 쾌감을 주기도 한다.   



"‘어떻게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동안 나는 수많은 책을 읽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 뿐 책에서 습득한 지식을 제대로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에 쓰인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반문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생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사유란 이런 것이다. 그렇게나 노력했지만 나는 제대로 생각할 줄도 모른다.” 



세련된 페미니즘 소설 

역사를 관통하는 대서사시를 써내려갔음에도 역사적인 사건들이 인물을 압도하지는 않는다. 사건과 개인이 살아가는 태도를 상세히 서술하면서도 역사적인 사건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본다.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관통하는 작품인 만큼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페란테는 릴라와 레누를 역사의 큰 강으로 흘려보내면서, 출신과 계급, 정치적 성향, 성별이 다른 수많은 인물들도 함께 동동 띄워 놓았다. 이들은 4권, 2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동안 역사의 큰 그림을 이루는 각각의 조각이 된다. 재미있는 점은 그 와중에 정작 주인공 레누의 아버지는 한 번도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로만 장식될 뿐이다. 그만큼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에서는 모계, 즉 딸과 어머니의 관계가 크게 부각된다. 그래서 그녀의 문학을 페미니즘 문학이라 일컫기도 한다.   



 ‘페란테 열(Ferante Fever)'에 빠지다   

분명 소설을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역사 공부를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나폴리는 이탈리아 도시 가운데 잘 사는 편에 속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이탈리아 사람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이다. 나폴리는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까지 독립된 나라였고, 역사적으로 침략을 많이 받아왔다. 이런 이유로 여러 문화가 뒤섞여 나폴리 시내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 정도로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한다. 묘하게 이탈리아 역사에서 한국이 보인다. 우리나라처럼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도 많이 닮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위정자들의 무관심과 부패와 탄압으로 죽어가면서도 선거철이 되면 자신들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나폴리에서는 여전히 역겨운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왕정복고주의자든 파시스트든 기독교민주당이든 자신들이 저지른 더러운 일을 덮고가기 바쁘다.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가 겪은 격동적인 경제개발 현대사를 레누와 릴라 두 인물이 대변한다. 이런 강한 흡입력 때문일까, 그녀의 소설을 두고 ‘페란테 열병(Ferante Fever)'이란 말이 생겼다. 


“책은 한 번 출간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만약 책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다면 저자가 독자를 찾아 나서겠지만, 남아 있지 않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에는 최고의 열정과 뻔뻔함, 아주 계획적인 불복종이 필요하죠.”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누구인가? 

엘레나 페란테는 나폴리 출신이라는 점 외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일찍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보냈다는 사실 정도만 밝혀져 있을 뿐이다. 1992년부터 작품을 쓴 이후 한 번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언론 인터뷰도 드물게 서면으로 하는 정도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필명 뒤에 분명히 다른 유명 작가가 숨어 있을 것으로 추측했던 기자들이 열심히 파헤쳐 보았지만,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고 아직도 그녀의 존재는 얼굴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로만 남아 있다. 엘레나 페란테는 25년 동안 은둔하며 오직 작품으로만 말하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이 부재가 만들어낸 창작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작가를 지우는 순간 작품은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작가의 부재로 생긴 텅 빈 공간을 작품이 채운다는 것이다. 



정통 이탈리아 문학을 만나보자 

이탈리아의 한 도시인 나폴리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를 깊이 다룬 소설은 지금까지 없었다. 지방색이 강하고, 지방에 대한 묘사가 세밀한 것이 이탈리아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인데,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이탈리아 문학 전통을 충실하게 잇는 작품인 동시에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에 속한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공감으로 끝날 수 있는 소설이 세계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이야기가 압도적이라 해도 한 손에 들기도 벅찬 사전 두께의 책 4권은 부담스럽지 않을까? 글쎄, 그런 걱정은 일단 한 페이지 읽어보고 이야기하자. 『나폴리 4부작』을 읽기 시작하면 당장의 고민과 해야 할 일들이 이 책을 끝내고 나서야 떠오르게 된다. 요즘은 흔치 않은 대하소설의 매력을 다시 갈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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