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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an 14. 2020

뒷골목 사내들의 짠내나는 인생'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뒷골목 사내들 짠내나는 인생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작가는 기존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들려주는 사람일 뿐.” 발표하는 소설마다 어찌 장돌뱅이 만담꾼이 떠드는 말처럼 허무맹랑하냐는 지적에 천명관 작가가 응수한 말이다. 이토록 솔직한 이야기꾼이 어디 있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홀리게 만드는 그의 마성에 한번 빠져볼까.  
 



“여기는 남자들의 세상, 남자들의 세상이지. 하지만 여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소용없어.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쓰라림에 헤맬 뿐.” 


배꼽 빠지도록 재미있다
'인천 주안역 뒷골목의 편의점 앞, 무지개색 파라솔 밑엔 건달들 몇 명이 둘러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건달들의 이야기다. 노회한 조폭 두목 양 사장을 중심으로 한방을 찾아 헤매는 남자들의 지질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중국 무협지처럼 좌르륵 펼쳐진다. 강한 척 하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남자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여자 없이는 그저 껍데기뿐인 남자들끼리 허풍스러운 대결을 계속하다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그만의 독특한 서사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온다.  


뒷골목 낙오된 인생들이 소설 주인공 

그의 소설에는 건달, 창녀, 백수, 에로영화 감독, 한물간 배우, 대리기사 등 소위 삼류인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주인공 울트라는 가진 것이라곤 큰 덩치와 주먹뿐인 무식한 싸움쟁이다. 돈을 만들기 위해 훔친 종마에 반해 애지중지 돌볼 만큼 엉뚱하고 순박하기도 하다.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심성은 선한 주인공의 모습을 쫓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응원하는 마음이 피어올라 그가 여자랑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뻔한 재벌남 대신 건달, 평범한 회사원 대신 창녀가 등장하는데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뒷골목 인생들 또한 우리와 별다를 바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임을 꽤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경쾌하게 그려내는 특유의 기술 때문이리라.  


가만 보면 천명관 작가의 전작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자꾸 연상된다. 그의 작품에는 울트라 같은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고래』에서는 키가 팔 척이 넘는 장골의 사내인 걱정, 『고령화가족』에서는 120kg 거구에 밥만 축내는 백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애를 보여주는 형,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는 이소룡처럼 되고 싶어 인생을 바치는 삼촌이 나온다. 작가는 왜 유독 이렇게 비현실적인 단순무식남에게 애착을 가질까? 천명관 작가는 모두가 낙오자라 손가락질 하는 인물을 통해 시대상을 고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돈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대한민국 성장을 이끈 아름다운 주역임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한 장면 서술이 압권 

이야기는 유난히 구조가 가볍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마치 화려한 액션 활극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생생하다. 이 소설은 로맨스나 무협 같은 장르소설을 올리는 웹소설 플랫폼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작정하고 무거운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닌 데다 작가의 필체 또한 정통 서사문학과 거리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미있는 소설이 탄생했다. 인물의 내밀한 묘사보다 장면을 서술하는데 더 많이 할애했다. 그래서 신선하다. 천명관 작가는 소설 전에 시나리오로 먼저 데뷔했던 작가다. 그래서인지 눈으로는 활자를 따라가는데 머리로는 잘 짜인 각본이 상영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영화계는 일찌감치 천 작가의 재능을 알아봤다. 지난해부터 ‘뜨거운 피’ 촬영에 들어가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디서 한번쯤 들어봄직한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소설로 엮는 재주가 소설가의 덕목이라면 천명관은 타고난 소설가임에 틀림이 없다. 기존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세련된 화법으로 비튼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 지닌 가장 통쾌한 은유는 제목이 주는 반어법이다. 소설 속 건달들은 좌충우돌 부서지며 깡패 자부심 하나로 살아간다. 적어도 그들 바닥에서는 큰소리치고 건달답게 산다. 그러나 막상 전국에서 거물들이 모여들자 상황은 급변한다. 회장, 사장, 형님하던 건달들이 사실은 동네 잡범, 양아치, 덩치였다. 고작 이것이 바로 그들이 뒹구는 '남자의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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