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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Feb 20. 2020

새해 '처음처럼' 다시 시작해보자!

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 신영복의 언약 『처음처럼』 중 


첫사랑, 첫 만남, 첫 눈. 어떤 단어 앞머리에 붙는 ‘첫’은 유난히 애절하다. 왠지 특별해보이기도 하다. ‘처음’의 힘이다. 첫사랑 잔상이 진한 이유도 처음이라는 강렬한 기억 때문이다. 순두부 골목에도 원조 간판이 붙은 집에만 길게 줄이 늘어선 것과 같은 효과다. 처음이 주는 힘은 특별하다. 2020년이 시작된 지 두 달째, 야심차게 시작한 새해 각오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허무하다면, 잠시 쉼표를 찍어보자.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달려보자는 의욕을 갖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 신영복의 『처음처럼』이다.  


신영복 교수, 20년 복역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이 쓰고 그린 글, 그림 가운데 고갱이들을 가려 모은 잠언집이다. 선생의 평생의 사상이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목 처음처럼 앞에는 (역경에도 불구하고)라는 괄호 안 문장이 생략돼 있다. 오늘날의 역경이라 하면 생활고, 우울증 또는 취업난을 떠올린다. 신영복 선생의 역경은 짐작 가능한 수준의 차원을 넘는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20년 20일을 복역하다가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감옥에서 20년을 보내면서 겪은 경험과 생각을 담아 출소한 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냈다. 그가 감옥에서 온몸으로 부딪힌 밑바닥 세상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절제된 문장으로 풀어낸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적셨다. 대중에게 진보진영 지식인, 신영복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출소 후 곧바로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 사회과학입문, 중국고전강독을 강의한 그는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2016년, 숨을 거뒀다.  


잠언집 '처음처럼'에 일상에서 느낀 소회 담아 

이 책, 『처음처럼』에는 익숙한 글귀들이 참 많다. 사소한 일상의 소재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멋이나 과장을 쏙 빼고 내공 있는 겸손함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겸손을 풀어내기에 처음이라는 단어는 참 적절하다. 그는 역경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픔은 세상의 수많은 아픔 중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표현한다. 여기에는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가 아픔인 만큼 아프고 힘든 시간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그리고 자신의 역경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일도, 타인의 역경을 스스로가 이해하는 일도 힘들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먼저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 꿈은 꾸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누구한테서 꾸어올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꿈과 동시에 갚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깸은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집단적 몽유는 집단적 각성에 의해서만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수감 시절 일화를 유쾌하게 회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징역살이는 여름이 더 괴롭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36.5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겨울철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별인 셈이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하다. 더구나 그 증오가 자기의 고의적인 소행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든다. 스무 번의 여름을 난 징역 베테랑의 뼈있는 자기성찰이다. 그 와중에 신영복 선생은 가장 큰 절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라고 말한다. 증오의 대상을 잘못 파악하고 스스로 혐오하기 바쁜 슬픈 현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현실이 가장 큰 절망이다.   


소주 '처음처럼'이 신영복 선생 글씨체 사용 

책은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간다. 중간 중간 간단한 그림이 정적을 깰 뿐. 그런데 어쩐지 표지 글귀가 눈에 익다. 초록 병에 담긴 맑은 액체, 소주가 떠오른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 손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작품이다. 처음처럼이 2006년 첫 런칭할때 제조기업 두산은 '지식인이 자신의 글을 소주병에 붙이는 것을 과연 허락할까?' 걱정했지만 선생은 서민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에 자신의 글이 실리는 것에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서 흔쾌히 허락했다. 저작권료도 받지 않으려 했다. 결국 저작권료 1억 원은 그가 당시 교수로 재직하던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이 외에도 광화문 교보문고 앞 비석에 새겨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글귀도 신영복 선생의 작품이다.   


'신영복체'가 전하고자 하는 처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2020년, 당신의 굳센 시작을 격려하는 신영복의 마지막 편지 『처음처럼』과 함께 느슨한 주먹에 불끈 힘을 넣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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