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이 그립지만, 지금도 나쁘지는 않아요” COVID-19로 달라진 뉴요커의 일상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 소장이 한 말이다. 이토록 끔찍하고 무서운 말이 어디 있을까. 갑자기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요즘이 그렇다. 텅 빈 뉴욕 맨해튼 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현실인가, 영화인가 착각이 든다. 뉴요커의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평범하고 당연했던 일상의 소중함 깨달아”
뉴욕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J씨. 3월부터 지금까지 긴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앞으로 언제까지 집 안에서 가족들하고만 지내야 할지 알 수 없다. J씨는 퇴근길 맥주 한 잔, 친구들과의 수다, 타임스퀘어 쇼핑, 센트럴파크 산책... 평범하고 당연했던 것들이 죄스러운 일처럼 돼버려 씁쓸하다고 말한다.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는 지나갔다. 대부분 식당이 야외 테이블에 손님을 받는다. 이렇게라도 외식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미술관, 박물관도 8월 말 즈음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서히 하는 듯 보인다.
“실업급여로 생활하며 자기계발에 집중”
대형 커피체인점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H씨는 지난 7월 퇴사했다. 코로나로 인해 지점 문을 닫은 동안에도 직원들 월급은 그대로 나왔었다. 회사 재정난이 심해지자 직원들에게 세 가지 선택권을 줬다. 120일 무급 휴직을 선택할 것인가, 근무 시간을 대폭 줄이고 적은 월급을 받을 것인가, 퇴사하고 실업급여를 신청할 것인가. H씨는 퇴사를 선택했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우울하지만 쉬는 기간을 이용해 벼르던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매주 600불 정도의 실업급여가 들어오기 때문에 당장 큰 타격은 없다.
많은 뉴요커들이 생계 현장을 떠나 실업급여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있는 직원도 줄여나가는 판이라 사람을 구한다는 회사는 거의 없다. 앞으로 다가올 긴 고용불안, 경제공황에 대비해 H씨는 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자격증 준비에 들어갔다.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갈증은 여전하지만 맨해튼 거리를 누비는 대신 거실 창가에 앉아 아늑한 홈카페 정취를 즐기기로 한다.
“사회생활 스트레스 없어 편하기도”
이렇게 뉴요커의 일상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달라졌지만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J씨는 꾸준히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서 일을 하니까 단순히 '일'만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상사 눈치나 사내 정치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맡은 일을 마치고 컴퓨터를 닫아 버린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어 오히려 편하다.
한시간씩 걸리던 출퇴근 시간이 10초로 줄었다. J씨는 저축한 시간만큼 운동을 한다. 집 앞 공원에 나가 한시간씩 조깅을 하면 잡념이 사라진다. 집 안에 먹고, 자고, 일하면 자기도 모르게 늘어질 수 있는데 이렇게 하루 한시간씩 땀을 빼면 활기가 충전된다. 덕분에 덤으로 복근을 얻었다.
“이렇게 깨끗한 뉴욕 지하철은 처음”
H씨는 요즘 지하철 타는 일이 즐겁다. 대부분 뉴요커들이 그렇듯이 H씨는 자가용이 없다. 지하철과 버스, 우버를 이용한다. 장을 보러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최근 들어 지하철에서 향기가 난다. 심지어 반짝반짝 광도 난다. 뉴요커의 발이라 불리는 지하철은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러나 코로나가 발발하자 뉴욕시가 심야 시간대 지하철 가동을 중단하고 청소, 방역을 진행했다. 뉴욕 지하철이 멈춘 것은 115년 만에 처음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찌르던 뉴욕 지하철은 알싸한 소독약 냄새로 가득하다. 코로나가 가져온 산뜻한 변화이다.
코로나가 물러간다 해도 그 뒤에 짙게 드리운 어둠은 언제 걷힐지 알 수 없다. 그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우리 주변의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듯하다. 가족이 건강함에 감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친구들과 온라인 채팅으로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자. 코로나의 재앙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일상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일깨우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