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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Sep 13. 2022

모든 순간이 동화였다


 


모든 순간이 동화였다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세상은 호기심 천국이며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생기 넘치고, 발랄한 긍정 에너지가 가득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소녀는 훌쩍 자라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이 나이쯤 되면 여느 또래 여자들이 그렇듯이 삶에 대한 약간의 지리함, 조금은 달관한 듯 한 표정과 말투가 엿보이기 마련이다. 가족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일과 육아에 치여 어딘가 조금은 고단해 보인다. 농담 끝에는 씁쓸함이 묻어있고,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머리로는 오늘 저녁은 뭐해먹을지 고민한다. 오늘 주식 장은 얼마에 마감했나, 자동차세 낼 때가 언제더라 같은 현실적인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른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나이와 상황에 맞게 생각이 재편된다. 오히려 해맑은 어른은 눈치 없이 세상물정 모르는 낙오자 취급받기 일쑤다. 몸은 어른일지 몰라도 마음 깊은 곳에는 빨간 머리 앤처럼 눈빛 초롱한 소녀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른으로 살기 지치는 날이 오면 <모든 순간이 동화였다>를 펼쳐보자. 첫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봉숭아 꽃물을 들여 본 경험, 학교에서 꾀병을 피우고 나만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게 비밀을 속삭여 본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떤 날에는 하굣길 교문 앞에서 병아리를 사며 어린왕자처럼 예쁜 친구가 생겼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책을 쓴 김정인 작가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들춰내며 추억을 자양분삼아 자라난 당신,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조곤조곤 달랜다.  


작가는 임신 전까지 국제학교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한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출산 후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면서 진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그동안 맏딸로 존재했던 30여년의 시각이 엄마로 변한 뒤 매일 아이들의 눈을 통해 자신의 유년기를 되돌아보고 있다. 어린 시절 그에게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이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당연하지만은 않은 노력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뿌리를 담아야 겠다고 다짐하고 이 책을 집필했다. 특이한 점은 어른의 시선에서 돌아본 지난날의 회고록이 아니라 ‘어린 나’ 시선에서 본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며 지난 시간 속 어린 나를 떠올릴 때가 있다. 아련해지는 것도 잠시, 이내 어쩜 저렇게 천진할까 싶어 신기하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고 행동에 계산이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시도한다. 가령 잼 뚜껑 열기 같이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큰 모험이다. 관계에 눌려 자신을 희생하는 일도 없다. 그 나이라서 가능한 특권이다.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모르듯이 그 나이에는 왜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만 싶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지는 모순을 느낀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 161p 


김정인 작가는 무언가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되어 기쁨과 동시에 참 무거웠다고 말한다.  그 무게감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제한할 수밖에 없다. 어른으로서 책임감은 가지되 본래의 나 자신은 잃고 싶지 않은 마음. 그 균형추를 유지하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을 키우며 배운다.     


이 책은 마치 부모님께 바치는 성장후기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시간이 지나 작가의 세 아이들이 컸을 때 엄마의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책에 소개된 12월 31일에 해넘이 등산 가기, 폭우 속에 산책가기, 비밀 노트에 편지 주고받기, 자연 속에 풀어 키우기 같은 이벤트는 작가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했던 놀이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기억하는대로 같은 이벤트를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마치 가족 전통으로 대물림하듯이. 훗날 아이들은 엄마가 봉인한 타임캡슐을 훔쳐보며 아련한 감상에 빠지지 않을까.      


한때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착각한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저절로는 없다. 학습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알게 된다. 흔히 소주가 달게 먹히면 어른이 됐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으면 진짜 어른이 됐다고도 한다. 정답은 없다. 과연 무엇이 어른다운 어른을 만드는지 궁금하다면 모든 순간이 눈부셨던 그때를 기억해보자. 그리고 스스로 물음을 던져보자. 내 안의 어린 자아와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어리고 외로웠던 나를 꼭 안아주고 많이 힘들었냐고 안부를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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