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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Sep 21. 2022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파친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 <파친코>는 이렇게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한계와 굴레에 갇혀 살아간다. 선천적 장애와 가난, 이민자라는 정체성은 그들에게 삶의 선택권을 앗아간다. 그럼에도 투쟁적으로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소설의 첫 문장은 이 소설의 주제와도 같다. 


제목이 왜 <파친코>일까? 작품은 1910년부터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무대는 부산 영도에서 출발해 일본 오사카까지 광범위하다. 파친코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행성 게임기 이름이다. 재일 교포들은 고국을 떠나 있었기에 해방과 조국 분단, 한국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다. 대신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일본의 패전을 경험했으며 남과 북의 정치 이념에 따라 민간과 조련으로 분열되었다.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일본에 남은 사람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어렵고 출세가 불가능했다. 남겨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다. 제목 파친코는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도박 같은 재일교포들의 삶을 상징한다. 뜻밖의 횡재를 할 수도 있지만 일시에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파친코 운영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으나 야쿠자와의 연관성 때문에 폭력적 이미지가 강했다. 당연히 지역 사회에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없었지만 재일교포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없기에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다. 그들에게 파친코는 돈과 권력과 신분의 상승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다 자살한 어느 일본 중학생의 이야기는 선천적인 이유로 상처 받는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 태생의 한계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서 탄생한 소설 <파친코>는 단순한 도박 이야기가 아니라, 멸시받는 한 가족이 이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투쟁적인 삶의 기록이며 유배와 차별에 관한 작품이다.  


“복잡한 술집에서는 남자들이 술을 마시며 던지는 농담 소리가 크게 울려댔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 중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 낯설고 살기 힘든 땅에서 가족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 1. 226p 


파친코에 등장하는 재일교포들은 모두가 정체성 혼란을 겪거나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조차 일본인이 될 수 없고 영원히 조선인 취급을 받지만 조국에서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미국 영토에서 태어나면 누구에게나 시민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은 일본이 고향이고 일본어가 모국어인데, 왜 자신이 외국인 취급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모자수는 일본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조시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파친코를 읽으며 한국의 근대사가 얼마나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피해자는 국민이지만, 아무도 국민이 당하는 고난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나라를 잘못 운영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국민을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로 떠나보낸 우리의 무능한 정치가들은 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려운 시기에 문제가 많은 나라에 태어났지만 각자 희망을 품고 산다. 역사가 우리를 망치고, 정치가들이 나라를 망쳐도 국민들은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 없이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는 세상은 이상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쓴 이민진 작가는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이민 1.5세대이자 역사 전공자로서 불안정한 국제 정세와 일제 침략이 낳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에 관심을 갖게 된 작가는, “역사가 함부로 제쳐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며 ‘자이니치’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그 시절에서부터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함께 일본에 머물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한 작가는 그때까지 쓴 초고를 모두 버리고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역사적 재앙에 맞선 평범한 개개인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재일조선인 3세 ‘솔로몬’에서 ‘선자’로 바뀌었고, 제목은 <모국> 대신 <파친코>가 되었다. 올해 초에는 애플TV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가 공개되기도 했다. 원작과 드라마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평단과 대중을 감동시킨 힘은 무엇일까. 궁금하다면 책을 먼저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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