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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an 07. 2023

방구석 미술관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의자에 기대어 있다.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우는 표정인 것 같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우두커니 서서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바닥과 침대에는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야속하게도 방 안 벽지와 가구는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에드가 드가가 그린 그림 <실내(강간)> (1868~1869)이다. 드가는 아름다운 발레리나 시리즈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예술을 사랑한 그가 이렇게 당황스러운 제목과 내용의 그림을 남긴 이유가 뭘까. 조원재 작가의 책 <방구석 미술관>에 해답이 있다.  


작가는 당시 파리 사회와 드가의 삶을 조망하며 드가가 이런 그림을 남기게 된 배경을 추측한다. 당대 발레리나는 빈민가 소녀들의 몫이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매일 가학적인 훈련을 견디며 불구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연습하고 그 후에도 무대 연습을 하는 발레리나의 삶은 스타 아이돌을 꿈꾸는 소속사 연습생을 연상시킨다. 극한의 직업이지만 소녀들이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생계를  넘어서 운명까지 바꿀 수 있는 화려한 성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실제 돈 많은 귀족 눈에 띈 발레리나는 당시 교사의 연봉에 무려 8배에 달하는 돈을 받았다. 일단 오페라에 들어오고 나면 창녀로서 운명이 결정된다. 그곳에서 고급 창녀로 길러지는 것이다.  


본래 발레는 상류층이 즐기는 문화생활로 관객 대부분이 부유한 귀족이나 자본가였다. 그들은 쾌락의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로 찾아가 어린 발레리나를 유혹했다. 스폰서(sponsor)란 개념도 이때 생겼다.  


조원재 작가는 드가가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방탕한 나날을 보내던 여느 부르주아 사내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독신남으로 발레리나 소녀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고된 삶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소녀들도 그의 진심을 알고 적극적으로 드가 그림의 모델이 되기를 자처했다. <실내(강간)>이라는 작품명도 드가가 아닌 작품을 본 다른 남성들이 지었으며 드가는 그저 ‘풍속화’라 불렀다고 한다.  


무엇이든 알고 보면 새롭다. 내막을 몰랐을 때에는 그저 어린 소녀들을 훔쳐보는 징그러운 관음증 환자로만 치부했지만 알고 보니 당시 파리의 풍속을 지탄하는 용기있는 예술가였다.  


책에는 반 고흐, 폴 세잔, 마네, 클림트 등 유명한 화가의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미술 문외한도 거부감 없이 미술을 즐길 수 있도록 소개한다. 미술은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취지로 멀게만 느껴졌던 화가들을 인간미 넘치는 ‘형’과 ‘누나’로 만드는 작가 조원재의 재기발랄한 스토리텔링이 눈에 띈다.  


<절규>를 그린 화가 뭉크가 평균 수명을 높인 장수의 아이콘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뭉크를 떠올리면 요절한 비운의 작가로 기억된다. 폐렴, 결핵 같은 질병으로 피를 토하며 젊은 나이에 쓰러져 죽는 게 응당 예술가다운 줄 알았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작품은 '미완' 또는 '무제'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실리는 장면을 상상한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실제로 뭉크는 연이은 가족의 죽음과 잦은 병치레로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았다. 건강염려증 덕분이었을까. 평생을 관절염과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당시 평균 수명의 30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평생 죽음을 의식했던 뭉크는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 뭉크 '예술 심장론' 중


‘영혼의 화가’ 반 고흐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속사정, 그림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마네가 미술계 거장들의 ‘갓파더’인 이유,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화가 피카소가 선배 미술을 훔치며 ‘노상강도’라는 소리를 듣게 된 까닭까지. 예술가들의 은밀한 사생활과 명화가 탄생하게 된 경위를 훔쳐보자.  


이 책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떠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신상 털기 수준으로 생생한 시각으로 보여준다. 한 분야에 대가가 되면 보통 다른 분야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많은 화가들이 꽤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작가가 피카소이다. 원조 멀티 플레이어로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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