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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r 26. 2023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정말? 대박! 와, 소름. 존맛탱구리야.” 연기를 배우는 학생들이 도무지 늘지 않는 연기력과 서툰 감정 표현의 한계를 토로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90분 동안 식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이다. 발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것 같은데, 그들만 이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나의 언어가 나의 한계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곳을 지나가며 만나던 사람을 만나고, 비슷한 패턴으로 한 주를 지내다가 문득 사용하는 단어가 굉장히 단조로워지는 것을 강하게 느낀 적이 있다. 사용하는 낱말의 수가 적어지는데 게으름이 붙으면, 어떤 감정도 그냥 관성적으로 내뱉게 되는 몇 개의 단어로 처리되곤 한다. 이를테면 ”헐", "대박" 같은. 때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생각이 덩어리지곤 한다. 노래를 듣다가, 그림을 보다가 내 덩어리와 비슷한 것을 만났을 때 괜히 반가워 내적 탄성을 지른다. 환희가 느껴지는데 이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 언어로 꺼내주지 않아서 그저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치부되곤 했던 마음들에 제 이름을 찾아 불러주자.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 그림책 작가 마리야 이바시키나의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은 내 마음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책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낄 때가 있는데 모국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이 미묘한 감정을 정확히 나타내는 외국어가 있다면? 영어 ‘히라이스’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을, 네덜란드어 ‘헤젤리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주는 고양감을, 독일어 ‘토아슈루스파니크’는 잃어버린 기회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이렇듯 다른 언어권에서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상황을 정확히 나타내는 세계 17개국의 71개 단어가 당신의 감정에 이름을 달아 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삶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낯설고도 아름다운 이국의 언어로 전하고 있다. 또한 몇몇 이질적인 단어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각 나라의 고유한 정서, 그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장면들은 낯설고도 매혹적인 공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거나 지금 당장은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곳으로 말이다. 


나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모국어인 한국말로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다양한 인종과 언어로 버무려진 미국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세계 언어를 접하게 된다. 특히 미묘한 감정을 정확히 나타내는 외국어를 들으면 기분이 새롭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별을 보며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들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질감이다. 문화의 차이가 분명하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서로 비슷한 일을 겪으며 희로애락을 느낀다. 나만 느꼈다고 생각했던 특별한 감정이 다른 나라에 하나의 단어로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심지어 그 감정을 이르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이들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와 세상이 끈끈하게 연결된 기분이 든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황홀감을 뜻하는 이집트어 ‘타라브’, 다른 사람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내가 느끼는 수치심을 나타내는 핀란드어 ‘뮈오타하페아’……. 길게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한 단어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이 신기하다.  


'고모레비'가 나만 아는 아름다움인 줄 알았던 때가 있다. 맑은 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그 반짝이는 볕을 맞으며 느끼는 행복. 이 구체적인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정확하게 명명하는 단어가 이국에 존재함을 알았을 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아름다운 그림책이 누군가에게는 ‘콤무오베레(누군가의 이야기가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을 이르는 이탈리아어)’로, 누군가에게는 ‘페른베(아득히 먼 곳에 이끌리는 마음을 이르는 독일어)’로, 누군가에게는 ‘보르프럿(아직 일어나지 않는 기쁜 일을 미리 짐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이르는 네덜란드어)’로 다가가기를 기대해 본다. 


책에 소개된 아름다운 이탈리아 단어로 칼럼을 마무리할까 한다. 


돌체 파르 니앤테dolce far niente, 모든 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달콤한 게으름. 그 순간을 즐기는 일이니, 시간을 허비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 시간은 이미 충만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바닷가를 따라서 걷기.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는 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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