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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r 21. 2023

우리는 벚꽃이야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화양연화'라고 한다. 가장 아름답기에 한 번뿐이고 행복하기에 짧기 만한 그 시간. 그러고 보니 벚꽃이 활짝 피는 짧은 봄날이 화양연화를 많이 닮아있다. 계절은 돌고 돌아 봄은 또 오겠지만, 그 봄을 맞이하는 우리의 인생엔 도돌이표가 없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 덕에 매년 찾아오는 봄이 늘 새롭게 느껴지고 변함없는 설렘을 안겨주는지도 모르겠다. 


목련나무에 하얀 팝콘 같은 꽃이 매달렸다가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고 완전히 질 무렵 벚꽃이 피어나는 그때 비로소 제대로 된 봄이 시작된다. 목련도 봄꽃이긴 하지만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2프로 부족한 봄날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고 일어나면 분홍빛 벚꽃이 잎을 피우기 시작한다. 이쯤 돼야 뺨을 스치는 바람에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보드라운 바람, 바로 이거야. 봄이 왔구나.” 하면서 말이다. 


어린이 그림동화 <우리는 벚꽃이야>는 벚꽃을 그리고 있지만, 그 속엔 언제나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다. 엄마는 아이의 목도리를 동여매 주고, 행인들은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간다. 벚나무에게도, 우리에게도 겨울은 더디고 고된 계절이었다. 그러나 질척이는 눈길 속 갇힌 차를 서로서로 밀어주는 모습을 보며 돌이켜 생각해 본다. ‘우리’였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제목이 ‘나는 벚꽃이야’, ‘너는 벚꽃이야’가 아닌 ‘우리는 벚꽃이야’인 까닭을. 차가운 눈과 세찬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견뎌낸 벚꽃이었다. 


“나란히 함께 서서 추운 겨울 참아 내는 우리는 벚꽃이야. 세찬 바람이 온몸을 흔들어도 묵묵히 버텨 내는 우리는 벚꽃이야." - p.6 


올 듯 말 듯 애태우며 새침하게 구는 녀석이지만 따지고 보면 봄은 우리와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봄비와 함께 찾아와 하얗고 까맣던 풍경 위에 색을 틔워 낸다. 창문을 열듯, 책장을 양옆으로 열면 완연한 봄 풍경이 드넓게 펼쳐진다. 거리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고,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얼굴에선 이내 웃음이 번진다. 모진 겨울이 피어나는 벚꽃을 막을 수 없었듯, 마스크 한 겹으로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막을 순 없다. 비록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경제 위기로 잠시 멈칫해 있지만, 봄이 주는 설렘과 기쁨만큼은 마음껏 느껴보자. 


천미진 작가는 벚꽃이 환히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추운 겨울을 꿋꿋이 견뎌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차가운 눈이 펄펄 내릴 때도,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겨울이 모질다 한들, 결국 봄은 올 테니까. 기나긴 기다림 끝에 분홍 잎을 틔우고 마는, 이내 온 세상을 웃음으로 물들이고 마는 벚꽃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아냈다. 


동화책답게 화사한 그림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신진호 일러스트레이터는 ‘토독- 토독- 톡톡- 톡!’ 꽃잎을 틔우는 벚꽃의 움직임을 예쁘게 표현해낸다. 골목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분홍 물결, 피어난 벚꽃을 구경하러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 드넓게 펼쳐진 벚꽃 풍경, 두꺼운 겉옷을 벗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활짝 웃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진다. 겨우내 몸을 꽁꽁 웅크리고 있다가 마음껏 피어도 좋은, 마음껏 웃어도 좋은 계절이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다. 


때 되면 알아서 피는 꽃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일인가 싶다. 하지만 나무의 시선으로 생각해보면 깊이가 다르다. 꽃나무는 혹독한 긴 겨울동안 온 몸의 에너지를 모아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의 눈에는 봄이 오니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지만 그 고통이 아이를 낳는 산고에 못지않다. 아이를 품에 안기 위해 열 달 동안 뱃속에 생명을 품고 이윽고 세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엄마가 겪는 산고와 마찬가지다. 벚나무도 긴 겨울 추위를 견디고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렸다가 고통을 감내하며 톡톡 벚꽃을 피운다. 그렇기에 벚꽃은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이다. 그리고 벚꽃은 행복이나 시작을 뜻하는 전령사로 통한다.   


어린이 그림책이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에게 더 와 닿는다. 추운 겨울을 지나고 있는 당신과 나, 우리는 모두 벚꽃이라며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 부디 이 지루한 겨울을 견뎌내라고. 봄을 기다리며 잿빛 시간을 견뎌내라고 토닥토닥 위로한다. 저마다의 인생에서 어느 계절, 어디쯤을 통과하고 있던지 고운 빛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져도 여전히 아름다운 저 벚꽃 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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