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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Apr 30. 2023

동해 생활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노래했다. 나이는 그렇다. 눈을 감았다 뜨면 저절로 먹어 있는데 그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지나온 삶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찝찝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고, 늘어가는 나이가 짜증나서 그럴 수도 있다. 이를테면 마흔이라면 어엿한 중장년 세대로서 회사에선 과장쯤, 연봉은 15만 불쯤, 차는 중형 세단쯤, 집은 방4개 싱글하우스쯤 가진 사람이 돼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마흔이 되니 서른의 나와 별다를 바 없더라. 나이에 맞게 늙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작가가 있다. 송지현 작가는 이십 대에 등단해 첫 소설집을 출간했다. 삼십 대를 맞이하는 시기에 우울증에 빠진다. 녹록하지 않은 작가 생활과 어쨌든 먹고살아야 하는 준엄한 현실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홀로 때늦어 버렸다는 자괴감이 영혼을 잠식해 갔다. 성장과 성숙의 경계에서 송지현 작가는 지나치게 많이 잤고, 너무할 정도로 집에만 머물렀으며, 대책 없이 무기력해졌다.  


작가는 편하게 울고 웃고 싶어 동해로 왔다. 그 전에는 불편했던 나날이었다. 마음은 우울하고, 몸은 허약했다. 정신과에서는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응급실에서 진통제와 수액을 맞았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동해에 와야겠다 결심했던 장소도 응급실이었다. 시간은 새벽 3시. 


묵호 등대 근처에는 아버지가 친구에게 빌려준 돈 대신 받은 엘리베이터 없는 6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있었다. 이곳에서 작가는 동생과 함께 본격 동해 살이를 시작한다. 에세이 <동해 생활>은 송지현 작가가 일 년 동안 동해에 머물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도전기를 담고 있다.  


내용은 마치 판타지 같다. 누군가는 '문학에서나 보던 남프랑스적인 삶'이라고도 했다. 매일 늦게까지 잠을 자고, 회를 떠서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다가, 손님이 잘 오지 않는 카페에서 설렁설렁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글을 쓴다. 느즈막이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모래만 털고 밥을 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만 벗어나면 저절로 행복해지는 줄 안다. 동해라고 먹고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집값이 서울이 비해 많이 쌀 뿐, 물가는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오히려 지하철, 버스 짱짱하게 갖춰진 서울에 비하면 차 유지비와 보험료에 더 돈이 들 수도 있다. 일자리는 한정돼 있고 관광도시답게 돈이 잘 벌리는 시즌은 한철 잠깐이다. 세상 어디를 가든 돈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러니 쉬는 동시에 부지런히 일을 해야 생활이 유지된다.    


판타지 같은 일상이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벌이는 부족하지만 작가는 놀러 온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고 술을 마시고 바다에 빠지며 오늘을 살아간다. 분명히 더 나은 사람,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은 든다. 그렇지만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울고 웃었던 이미지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아마도 동해의 느긋한 시간 그 자체로 많이 위로받았던 것은 아닐까.

  

별다른 교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시대적 통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다만 강원도 동해시에서의 일기 비슷한 것이 사진과 함께 담겼을 뿐인데 읽는 내내 킥킥 웃음이 나와서 책장을 술술 넘기다가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얼큰한 술기운과 엉뚱한 실수로 빚어진 갖가지 사건들,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와 뜻밖의 만남들. 작가의 여정과 함께하면서 묘하게 일상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나 또한 끊길 듯 느슨하게 이어져 온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미처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던 가족들에 대해 되돌아본다. 웃음 덕인지 슬픔 탓인지 녹녹하게 젖어 든 송지현 작가의 유머와 통찰은, 우리 모두가 ‘그렇고 그렇게’ 살아 낸, 그럼에도 계속되는 생활과 조금은 우습고 역시나 서글픈 삶의 면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동해를 생각하며 버티곤 했다. 조금만 더 살아 내면, 이 시간을 건너면 동해에 갈 수 있다고. 그러면 나는 며칠쯤은 더 힘들게 보내도 괜찮았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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