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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Apr 24. 2023

순간을 믿어요



여기 자기가 대한민국 서울 도봉구에 찾아온 첫 번째 외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외계인은 석원에게 백 일 동안 하루 한 편씩 지구 영화를 골라줘야 한다고 한다. 그 외계인이 왜 나에게 찾아왔을까에서 시작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석원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어진다.  


석원은 꼭대기 층에 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래 14층에 살게 된다. 어느 날 위층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온 후 자정 즈음부터 새벽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콩콩콩쿵 일정한 소리가 난다. 그것은 석원에게 자지 말라는 소리와도 같다. 참다못해 항의하러 위층에 올라가지만 그 집 문에는 이러한 경고문이 쓰여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지 말 것. 절대.’ 초인종을 누르기라도 했다가는 무슨 사달이 생길지, 이후로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될지 흥미진진하지만. ‘어길 시 법적 조치’ 운운하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문 앞에서 석원은 돌아선다. 예민하고 소심한 우리의 주인공은 기이한 15층 사람을 외계인이라 부른다. 외계인이 찾아온 산문집이 있었던가. 놀랍게도 <순간을 믿어요>는 SF 추리소설이 아니라 이석원 작가 산문집이다.


그렇게 외계인에서 층간소음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15층에 사는 인물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언제 이렇게 홀랑 넘어왔지? 나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순간 이야기는 통통 튀어간다. 들은 이야기로 15층 사람은 식당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래서 식당으로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평생 처음 맛본 인생 냉면을 만난다. 그토록 찾던 환상의 냉면을, 위층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석원은 소음보다 냉면 레시피 전수에 더 집착하게 된다.  


굵직한 소재만 놓고 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의아하다. 하지만 읽다보면 석원의 의식 속에 술술 빠져든다. 냉면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된다. 냉면을 만든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그가 15층 사람이라 추측하지만, 이젠 더 이상 층간소음이 중요하지 않지만, 아무튼 냉면을 만든 그를 도무지 만날 수가 없다. 석원에게 느닷없이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끝나려고 그러나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사랑을 마주한 석원은 제대로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석원에게 사랑과 두려움은 동의어다. 늘 사랑 앞에서 최악을 상상하며, 언제 깨어질지 몰라 완전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 사랑이 끝나버릴까 두렵다. '완벽하다는 네 글자만큼 불완전하고도 불길한 단어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석원은 전전긍긍한다. 그것은 결국 사랑이 충만한 지금 이 순간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문자는 억양을 전달할 수 없어서 위험하고, 전화는 표정을 보여 줄 수 없어서 위험하고, 만나서 하는 건 그 모든 걸 숨길 수 없어서 위험하다면, 어떤 오해나 불필요한 마찰 없이 타인에게 나의 민감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p.37


이 이야기는 층간 소음에서 비롯된 석원의 좌충우돌 고생담이라 할 수 있다. 층간소음의 실체는 결국 엘리베이터 소리로 밝혀졌다. 그동안 받은 고통에 비하면 너무 허무한 결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과정에서 석원은 층간소음 사건을 파헤치는 것 이상의 발견을 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스스로를 격려해야 하는 그런 힘든 일들을 겪지만, 보통의 삶에는 고생한 시간이 만들어 내는 고마운 것들이 있듯이 이 이야기에도 그런 과정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이 담겨 있다.


석원은 여전히 보통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조금 더 소심하다. 이런저런 걱정도 많다. 하지만 전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한 발 나아간 모습을 보여 준다. 그렇게 그는 조금 성장했고,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 간다.  


이석원 작가는 책 이전에 한국 인디밴드 1세대격인 '언니네 이발관'리더로 먼저 알려졌다. 데뷔하게 된 계기가 독특한데, 이석원은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해 누구보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만 실제 노래나 연주는 전혀 할 줄 몰랐다. 레코드 가게에서 어깨너머로 수집한 잡지식을 바탕으로 90년대 초 PC통신 하이텔 메탈 동호회에서 지독한 악플러로 이름을 날리다가, 본인이 음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 것 같아 게시판에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언니네 이발관은 이석원이 고등학교 때 봤던 일본 성인영화 제목이었다. 이 거짓말이 점점 불어나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이석원은 음악에 문외한인 멤버들을 모아 가상의 밴드를 급조한다. 당시 노이즈가든에서 기타를 치던 실제 음악인 윤병주의 지옥훈련을 거쳐 정식 밴드로 데뷔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밴드가 '나무로 만든 노래', '가장 보통의 존재' 등 명반을 탄생시켰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밴드 결성 스토리다.


책 제목 <순간을 믿어요>는 언니네 이발관 정규 4집 앨범의 이름과 같다.  보통의 존재인 자신이 찌질한 일상을 살다 층간소음과 냉면, 여인을 통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이 무척 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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