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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n 04. 2023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2년 전 설날을 기억한다. 명절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여자 연예인들을 모아 놓고 축구를 한다. 제목마저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니. 웅장한 창단식과 그렇지 못한 축구실력 때문에 정말 골 때리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공 따라 우르르 뛰기만 하는 선수들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성장한다. 축구에 대한 진지함과 열정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어느새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게 된다. 여자와 축구, 나아가 스포츠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방송에 앞서 2018년 발표된 책이 있다. <피버 피치>로 알려진 영국의 축구 덕후 작가 닉 혼비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작가 김혼비의 본격 생활 체육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이다. 보는 축구, 하는 축구 모두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오랫동안 축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자들의 자리는 관중석. 김혼비 작가도 호나우두의 발기술에 반해서 새벽잠을 설치며 해외 축구를 보곤 했지만 필드에 서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독립하고 서른이 된 해. 미루고 미뤄왔던 버킷리스트, 축구를 해보기로 한다. 모집 공고를 보고 전화를 하자 무턱대고 일단 나오라고 한다. 입단 심사나 자격 같은 것은 묻지도 않고 바로 시작하자고 한다.  


축구팀 문을 두드린 이후 망설인 이유는 딱 하나이다. 축구가 팀 스포츠라는 사실. 왜 하필 축구는 11명이나 필요할까? 다른 10명은 어떤 사람들일까? 왜 나는 축구가 하고 싶은 것인가? 초개인주의자에게 단체 활동은 생각만 해도 몸살이 돋는 행위이다. 김혼비 작가는 얼결에 입단 첫날 몸을 쓰는 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연습 경기에 투입되고 만다. 신입 여자 선수의 대인 마크에 막혀 화가 난 시니어 팀 할아버지는 “다리 한 작이 분질러질 것이다”며 저주를 퍼붓고, 주장은 “치사하게 신입한테 시비 걸 거예요? 이렇게 치사하게 살다 갈 거야?”라고 당사자인 혼비 대신 서슬 퍼렇게 받아친다. 운동장 위에서 혼비 씨는 모든 것이 새롭고 놀랍다.  


대상이 무엇이든 본격적으로 사랑하는 행위는 아름답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가진 힘을 다 써서 부딪치는 그 행위는 때로 단단한 벽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은 열린 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에세이는 오로지 공을 차는 이야기인 동시에 여성이 편견과 제약에 맞서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을 기술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작가가 연습하는 축구 기술들이 점차 나아질 때 이제껏 몰랐던 낯선 영역이 열리고,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격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달리고 싶고, 강해지고 싶고,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가지고 싶다. 


책에는 축구를 잘하고 싶어서 근육을 키우고, 축구하는 데 거추장스러워 머리를 짧게 치는 이들이 나온다. 그렇게 할 기회를 알게 모르게 놓쳐 왔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하다. 생각해보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축구는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스포츠다. 운동장은 늘 가까이 있다. 축구는 팀 스포츠라 조금 못해도 옆에서 도와주고, 끌어주면 금세 소속감을 느낀다. 혹여 어릴 때 기회를 놓쳤더라도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성별이 여자일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여자가 그런걸 한다고? 험하게 뭐 하러?” 방해하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린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은 '여자가 oo을 한다고?'에서 oo에 들어갈 말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게 아닐까?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운동'이 될 수 있다. 그걸 작가와 동료들이 지금 하고 있다. 김혼비 작가는 세상에 축구하는 여자들이 한 팀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원래 운동은 머릿수가 많을수록 힘이 붙는 법이니까.   


초개인주의자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김혼비 작가는 어느새 축구팀의 일원이 되어 언니들의 눈치도 살피고, 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더욱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연습에 매진한다. 묵묵히 인사이드킥을 익히고 전방을 본 채 드리블을 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감독의 지시를 따른다. 그런 그도 축구의 결정물, ‘골’에 대한 욕심은 굳이 숨기지 않는다. 발만 빠르고 생각은 많은 왕초보 김혼비. 아직 부족한 실력 아래에서 작가가 찾은 방법은 리바운드 기회다. 코너킥마다 공격 진영까지 올라가 리바운드를 노린다. 호쾌하게 오버래핑할 수 있을 그날을 꿈꾸며 작가는 오늘도 축구화를 동여맨다. 어느 날은 골에 가까운 장면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골을 놓치기도 하면서.  


축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목표 비슷한 게 생겼다. 열심히 인사이드킥을,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턴을, 트래핑을, 리프팅을 연습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뿌듯했던 내게 ‘나도 저기서 뛰고 싶다.’, ‘나도 얼른 진짜 시합에 나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스쳐간 것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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