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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31. 2023

씨씨 허니컷 구하기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특히 소녀 주인공이 나오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따분하다 느낄 때,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와 내 생활리듬이 안 맞는다고 느낄 때 성장소설을 읽는다. 성장소설 주인공들은 대체로 밝고 꿋꿋하며, 이야기는 언제나 따뜻한 해피엔딩이다. 그러니까 성장소설을 읽는 건 나에게 행복쿠폰을 선물하는 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으로 식어버린 심장을 안고 살다가 죽어.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인생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회를 주지만,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회를 알아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어. - p.162


<씨씨 허니컷 구하기> 는 성장소설이다. 씨씨의 엄마는 빨간 새틴 구두를 길 한가운데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목격자는 우스꽝스러운 파티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아이스크림 트럭을 향해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비데일리아 양파 여왕’이라는 이름마저 우스꽝스러운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그날의 영광에 갇혀 지냈고 동네에서는 정신 나간여자로 통했다. 엄마의 상태를 알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아빠 때문에, 씨씨는 그런 엄마를 돌보며 외로운 애어른이 되어갔다.  


씨씨의 유일한 도피처는 책 속 세상이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혼자가 된 씨씨는 미국 남부의 친척 할머니에게 보내진다. 그렇게 씨씨는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씨씨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남부 여성들을 만난다. 그들을 통해 씨씨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 뜨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소중한 친구들과의 시간을 진심으로 채워가는 법을 배워나간다.  


<씨씨 허니컷 구하기>를 읽으며 소설의 배경이 된 1960년대 미국 남부 여성들의 생활을 어렴풋이 떠올려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탁보를 바꾸고, 한 끼를 먹더라도 예쁜 그릇에 정성스럽게 담아 먹고, 아끼는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쓸 모자를 일주일 내내 직접 만드는 일상. 그들이 하루하루 직접 겪어내며 얻어낸 인생의 지혜는 꽁꽁 얼어붙었던 씨씨의 마음을 녹였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마음속 상처가 그들의 진정한 환대,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은 우정으로 어느새 아물기 시작한다.  


씨씨는 엄마의 죽음에도 충분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그랬던 소녀가 뒤늦게 엄마를 위한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씨씨의 주변 인물들은 한 소녀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보낸다. 씨씨 주위를 둘러싼 사랑과 관심의 공기가 진한 복숭아 향기처럼 달콤하기 그지없다. 어른들은 저마다의 색채로 씨씨를 돌본다. 누구는 조심스럽게, 누구는 다정하게, 누구는 씩씩하게 삶의 철학을 가르친다. 모두 작정하고 보살피는듯하다. 제목 그대로 씨씨를 구하기에 열심이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은 혼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아이, 우리가 마음의 빗장을 풀고 구해줘야 할 ‘씨씨’는 누구의 마음속에나 있다. <씨씨 허니컷 구하기>는 세상의 모든 ‘씨씨’들을 위한 잔잔한 위로로 가득하다. 선한 마음들이 모여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책은 여자가 중심이다. 그나마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악역이다. 아내와 딸을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우는 무책임한 아빠, 경찰, 강도 등 나쁜 사람은 다 남자이다. 나쁜 남자 어른들 사이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던 씨씨는 남부 친척 할머니 댁에 가자마자 그곳의 분위기에 압도된다. 영혼에 온기를 채워주는 남부 음식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하고 진취적인 그곳 여성들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 배경은 1960년대,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씨씨의 성장과정은 남성 중심의 기득권 세력에 정면 대응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열두 살 소녀가 그 나이에 맞는 밝은 힘을 되찾아 가는 일은 여성이 사회 속에 반짝이는 별로 자리 잡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기가 어렵다. 현실은 버겁지만 성장소설에는 반드시 성장형 캐릭터가 나온다. 씨씨가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을 함께하고 있노라면 밝은 빛이 마음에 꽉 차는 대리만족이 느껴진다. 그들의 삶 자체가 위로가 된달까. 세상의 모든 씨씨들이 성대립, 인종대립 없이 누구보다 밝고 건강하게 커나가길 바란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한 명 있다면, 좋은 사람은 열 명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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