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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n 13. 2023

친절한 복희씨


 


작가가 오래 사는 것도 독자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에게 나이는 또 하나의 재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듦의 다른 뜻은 완숙해진다는 의미인데 박완서 작가는 때로는 꼬장꼬장하게, 때로는 칼처럼 날렵하게 우리네 삶을 써낸다.  


박완서 작가는 불혹의 나이가 되던 해에 첫 등단한다. 작가 본인이 늦깎이 데뷔를 해서인지 작가의 주인공들은 유독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어린 시절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는 '어른도 걱정이 있구나, 그러니까 걱정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나이가 들어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소설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미리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했고, 조금 더 삶을 자신 있게 살게 되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친절한 복희씨>의 등장인물들 역시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고, 어느 정도 삶을 안다고 말하는 나이대가 대부분이다. 주인공 복희씨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서울 와서 처음 취직한 가게의 주인과, 그러니까 서른 넘은 애까지 딸린 홀아비와 결혼했고, 어린 외손자를 걱정하여 딸이 죽고 없는 사위집의 안방을 버젓이 차지한 장모와 남편 가게의 군식구들까지 복잡한 가족 구성원의 일원이 됐다. 전처소생과 내가 낳아 기른 아이까지 오남매를 모두 결혼시켜 손자손녀까지 보게 된 이 나이에도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이 중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흐느적대고, 제 입 안의 침도 수습하지 못하게 된 탓이다. 뭐라고 말을 하지만 웅얼웅얼 버벌거릴 따름이다. 그런 그가 온전했을 때와 여전한 것은 왕성한 성욕이다. 일을 보고 뒤처리를 해줄 때의 내 손길에 쾌감을 느끼는 건 물론이고 약사에게 내 핑계를 대며 비아그라를 달라고 떼를 쓰는 그에게서 치욕감과 소름을 동시에 느낀다.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죽기도 억울하고, 누굴 죽일 용기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너 죽고 나 죽기를 선택한다. (중략)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 p. 264    


아니꼽고 치사한 이야기를 이토록 맵시 있게 해내는 것도 감탄스럽다. 표제작인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해 9편의 단편들은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의 신산한 삶을 그린다. 곰삭은 한이나 상처를 연상시키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 있고, 스멀스멀 육체에 기어든 병까지 감수해야 하는 그들. 그러나 이토록 보잘것없는 삶을, 작가는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한다.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는 작가가 고희로 접어든 2000년 이후 거푸 쏟아낸 작품들이다.  소설을 집필할 당시 작가 나이가 노년이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노인이라는 표피적인 이유를 접어놓더라도 <친절한 복희씨>는 노년문학의 정수라 부를만하다. 노인이기에 가능한 원숙한 세계 인식, 삶에 대한 중후한 감수성, 이에 따르는 지혜와 관용과 이해의 정서가 깊이 묻어난다.   


예를 들어 노인은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일이 어렵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움을 받아들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소통 문제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노인이 겪는 사사로운 사건들을 나열한다. 그것을 노인이 어떻게 극복하느냐를 다루고 있다. 이때 극복이라는 것은 반드시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문제는 덮고 지나가고, 어떤 것은 눈감아주는 것, 어떤 것은 한바탕 싸운 후 눈물을 다 흘려야 끝나는 일이다. 그렇듯 걱정에 대응하는 여러 방법을 보여준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은 경험이 다양하지만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경험치는 생겨도 문제 해결 방법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삶은 어렵지만 여전히 살아볼 만하다고 다독이는 듯하다.  


냉철한 사실주의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평범한 일상의 파편에서 재발견해낸 이야기가 박완서 작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 유려한 필력으로 각색됐다. 덕분에 과거 우리가 겪어왔던 힘들고 궁상맞았던 옛날의 모습을 미소를 띠고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작가가 삶의 무게로 빚어낸 문장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속에 담겨있는 비통함의 정체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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