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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l 17. 2023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제 책이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런던에 살고 있는 작가 줄리엣과 낯선 곳의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인연을 담은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재기 넘치는 칼럼을 연재하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줄리엣은 다음 작품의 주제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괴로워하던 그때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발신인은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문학회. 우연히 줄리엣이 팔아넘긴 헌 책을 손에 넣게 된 도시 애덤스라는 남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건지 섬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찰스 램의 책을 구할 수가 없다며 런던 서점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편지를 계기로 줄리엣은 문학회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조용히 지니고 있던 비밀도 조금씩 드러난다. 영국해협에 위치한 채널제도의 건지 섬은 프랑스 연안에 더 가까웠던 탓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일하게 독일에 점령되었던 영국의 영토이다. 독일군이 섬을 점령하면서 섬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재배한 작물과 키우고 있는 동물까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섬에서 돼지가 병으로 죽으면 죽은 돼지 마리 수까지 세어 독일군 상부에 보고를 했는데 주민 몇몇이 돼지 한 마리를 용케 빼돌려서 몰래 잡아먹는다. 오랜 시간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주민들은 고기 파티가 너무나 반갑고 황홀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독일군과 마주친다. 통금시간이 넘었기에 주민들은 혹여나 끌려가지 않을까 떨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독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둘러댄다. 임기응변으로 급조한 모임이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 그날 이후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모임을 이어나간다.  


얼렁뚱땅 만들어진 북클럽은 의외로 건지 섬 주민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나치 감시 아래서 오랜 시간 무기력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잃고 있었던 희망과 사랑을 발견한다. 책의 표현을 빌자면 이 북클럽에서 멀쩡한 사람은 단 두 명, 어부와 농장주뿐이다. 이 문학회는 주인 행세를 하는 하인이 만들었고, 회원은 넝마주이, 술에 찌들고 타락한 정신과의사, 말더듬이 돼지치기, 그리고 해맑은 푼수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에 특별하고 잘나기만 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줄리엣과 건지 섬 사람들의 편지는 책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소박한 이들의 삶이 문학회를 통해 변화되는 과정을 흥미롭고 유쾌하게 보여준다. 먹는 데만 관심이 있던 철물점 주인은 토머스 칼라일의 <과거와 현재>를 읽고 신앙을 바로 세우게 되었고, 알코올 중독자는 <세네카 서간집>을 읽고 술을 끊게 되었으며, 말없이 혼자 단절된 생활을 하던 도시는 이웃과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게 된다. 이렇게 북클럽은 점차 단순한 문학회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이 시기를 버텨낸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그린다. 책을 통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게 된 것처럼 주인공 줄리엣은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는다. 전쟁으로 독일군도 힘들고 건지 섬 주민들도 힘들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알 수가 없다.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섬과 끔찍한 기근, 강제노동으로 피폐해진 주민들뿐이다. 승자와 패자는 명확하지 않고 참혹한 현실만이 존재한다. 소설 속 주민들의 삶을 보면 그 어떤 대의를 내세우더라도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깨닫게 된다. 


국가란 무엇인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한다. 독일국민은 정부가 일으킨 전쟁에 의해 군으로 차출되고, 건지 섬 주민들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희생됐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서로 도우며 살아내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숭고함을 느꼈다. 척박한 땅에도 꽃이 피듯 건지 섬에는 그들의 따뜻한 인류애가 있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 저자가 두 명이다. 평생을 서점과 도서관에서 일하며 줄리엣과 북클럽 회원들만큼이나 글을 사랑했던 작가 메리 앤 셰퍼는 평생 단 한권이라도 좋으니 의미 있는 책을 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집필 도중 작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이 작품은 데뷔작인 동시에 유작이 되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남은 작업은 조카 애니 배로스가 맡았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떤 장르도 초월할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요즘 가장 큰 즐거움은 해안 절벽 위를 따라 저녁 산책을 다시 시작한 것이란다. 이제는 더 이상 가시철망 틈새로 해협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고, ‘접근금지’라는 대형 표지판 때문에 시야가 막히지 않아도 되지. 해변에 있던 지뢰는 모두 제거되었고, 이제 나는 언제 어디든 구애됨이 없이 걷고 싶은 대로 걸을 수 있게 되었어. 절벽 위에 서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뒤에 있는 흉측한 시멘트 벙커나, 나무 하나 없이 벌거벗은 땅을 보지 않아도 되거든. 아무리 독일군이라고 해도 바다를 파괴하지는 못했던 거야. -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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