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이 부자가 되려면 우선은 작은 항아리에라도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정, 가족 날파리를 돕고 싶다면 일단은 악착같이 작은 항아리에라도 물을 채워 놓고 그 항아리를 감추어 놓은 상태에서 그 가족 구성원의 정신 상태를 냉정히 파악한 뒤 이자로 나오는 한 바가지 정도만 퍼 주어라.
'세이노(Say No)'라는 필명으로 순 자산 1천억 원대 자산가가 쓴 에세이 <세이노의 가르침> 중 한 구절이다. 올해 초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1위를 휩쓸었고, 책 내용은 SNS를 타고 명언처럼 회자되는 중이다. 자수성가한 60대 흙수저 출신 남성의 이야기가 세대와 성별을 막론하고 불티나게 팔리는 비결이 뭘까?
그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독설이다. 날카롭고 명료하며 냉철하다. 성공을 위한 삶의 자세부터 좋은 의사·변호사·공무원 만나는 법, 훌륭한 일자리를 얻기 위한 전공의 역할 같은 실용적 조언을 건넨다.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 ‘놀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버려라’, ‘좋아하는 일이라고 섣불리 하지 마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몸값이 오른다’ 등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촌철살인과 같은 조언이 눈에 띈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 지녀야 할 태도를 조언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흔해 빠진 자기계발서들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담백한 문체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매력적이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조언했다가는 금세 꼰대 낙인이 찍힌다. 과거 경험을 섣불리 털어놓으면 라떼 시절 우려먹는다는 소리나 듣는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20·30세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진정한 어른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생긴듯하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책을 찾는 다수가 Z세대라는 점이다. 욜로, 워라밸 등이 유행하는 시대에 <세이노의 가르침>이 판매 1위 기록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역설이다.
<세이노의 가르침>의 인기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생존에 대한 압박감과 깊이 맞닿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살아내기 위해 가장 우선시되는 조건이 경제적 여유라는 데 공감하고, 어떻게 하면 도태되지 않고 부를 이룬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다. 시대의 무의식이 베스트셀러에 반영된 셈이다. 남들이 예스(Yes)라고 할 때 노(No)를 하라고 권한다는 점에서 결국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메시지로 연결된다.
그의 말처럼 부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소수다.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큰 불안감을 갖지 않을 정도의 포지션을 얻는 것 역시 만만치 않다. 경제적 자유를 얻는 과정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기 때문이다. 많은 유혹 앞에서 '아니오(No)'를 외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고통받고, 이 고통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돈을 쓴다. 가까운 사람이 비싼 물건을 사면 나 역시 사고 싶어지는 법이고, 주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떠나면 덩달아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나마 과거에는 가까운 사람들만이 비교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휴대전화 속 SNS만 펼치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일상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그만큼 비교 대상은 속절없이 늘었고, 지갑은 너무나 쉽게 열린다. 이런 본능에 No를 외치고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면 큰 절제력과 꼿꼿한 자기중심이 필요하다.
세이노 작가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구체적인 길거리 지식을 제공한다. 기존의 자기계발서가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가난의 원인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하고 있다면 세이노 작가는 낡고 투박한 잔소리 같아 보이지만 확실한 메시지로 지극히 평범한 개개인의 생존술을 전달한다.
책을 출간한 과정도 독특하다. 다음 카페 ‘세이노의 가르침’에 올린 글을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제본해 만들어 돌려 읽다가, 지난 3월 정식 출간됐다. 736쪽이나 되는데 정가가 7200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PDF 형태 전자책을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다.
그동안 웹상으로 공유돼 누구나 다운로드 받아 읽을 수 있었던 필명 세이노의 경제 칼럼 여러 편을 단행본으로 모아 출간한 만큼, 사전에 해당 내용을 접한 독자가 많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연은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2001년부터 언론사에 경제 관련 칼럼을 기고하며 팬층을 형성한 세이노 작가는 그간 자신의 글을 단행본으로 내고 싶다는 50여 개 넘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지만 돈을 벌려고 하는 심사가 뻔히 보여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출판사로부터 ‘책 가격을 팬카페에서 판매 중인 종이제본 값 6600원 수준에 맞추겠다’는 제안을 받고 수락했다고 한다. 책을 팔아 수익을 내기보다는 독자에게 칼럼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취지가 진심으로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