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했다. 누군가는 친구들을 다시 만나 설렌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불안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과 마주하면 늘 신경 쓰이는 게 시간이다. 수업에 늦지 않고 성실하게 학교를 가야 모범생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교칙이나 학생의 본분 따위로 강요되던 규율이 정말 중요했을까? 1분만 늦어도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거나 교실 뒤에 세워놓는 체벌이 진정 학생에게 교육적일까? 학창시절 기억 속에는 늘 답답함과 억울함이 얼룩져있다. 폭력의 정체는 정확히 호명하지 못하겠지만 분명 어딘가 부당하고 잘못된 점이 있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느껴왔다.
<지각대장 존>은 늘 지각을 일삼는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이야기다. 매일 등굣길마다 기상천외한 일을 겪는다. 악어가 책가방을 물어서 늦고, 그 다음날에는 사자를 만나 늦고, 다리를 건너다 커다란 파도에 휩쓸 늦는다. 가까스로 악어와 사자와 파도로부터 도망친 존은 뒤늦게 학교로 달려가지만, 지각을 면하지 못하고 선생님은 이 동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존이 등굣길에 겪은 일들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반성문을 쓰게 한다. 그렇게 존의 반성문 분량은 300개의 문장에서 400개 그리고 500개로, 나날이 늘어간다.
존의 말은 거짓말일까 아닐까? 선생님은 존의 말을 허무맹랑한 거짓말 취급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동네에 악어와 사자가 나온다고 인정해야 한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동안의 경험과 상식에 미루어 존의 말은 거짓말이라 판단하고 말 것이다. 사실 우리가 ‘거짓말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주먹구구식이다. 내가 경험한 것, 상상 가능한 선에서만 받아들인다. 결국 판단하는 사람의 잣대가 기준이 되곤 한다.
학교에서는 합리적 잣대를 갖고 판단하는 절대 권력자가 된다. 상대적 약자인 학생 앞에서 선생님이 악어나 사자가 나올 리가 없다고 자의적 해석을 선포하면 그 말은 곧 법이 된다. <지각대장 존> 마지막에 학교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존은 드디어 학교에 지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을 넘기면 선생님이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에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나온다. 구해 달라 외치는 선생님에게 존이 한마디 한다.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권력을 가진 선생님은 그동안 자신의 잣대로 존의 진실을 거짓말로 치부했고 존은 그렇게 규정당한 가짜 거짓말을 선생님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참으로 통쾌한 마무리다.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혼란스럽다. 어떻게 마을에 악어와 사자가 나타날까, 아이의 천진한 상상세계 이야기가 아닐까. 어디까지 들어주고 인정해 줘야 할까. 거짓말은 나쁜 행동이라 배웠는데 그렇다면 존에게도 거짓말 말라고 따끔하게 혼내야 하는 걸까.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존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존의 손을 잡고 함께 학교에 가 주는 것이다. 등굣길에 악어와 사자, 파도를 만나지 않으면 다행이고, 만약 만난다면 함께 위기를 극복하면 될 일이다.
존 버닝햄 작가는 권위적인 선생님과 선생님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존의 모습을 통해 교육 현실을 고발한다. 삐뚤삐뚤 한가득 빼곡하게 채워진 반성문이 책을 열자마자 첫 장에 나오는데 아이들과 소통되지 않는 학교 교육의 문제를 영리하게 꼬집는다. 동시에 교육에서는 이해와 관심이 가장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삽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존의 표정 변화이다. 독자는 인물의 표정을 통해 마음과 감정을 읽는다. 하지만 존은 이목구비가 그려지지 않거나 모호하게 표현돼 시종일관 무표정해 보인다. 악어를 만나 가방을 빼앗길 때, 사자에게 바지를 뜯길 때, 분노에 날뛰는 선생님 앞에 서 있을 때도 감정표현이 없다. 하지만 그림책을 들여다보면 감정은 은폐와 동시에 노출된다. 넓고 텅 빈 배경과 대비되어 왜소하고 작은 크기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구체적인 표정 묘사 없이도 존이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 짐작하게 한다.
<지각대장 존>의 원제목은 <J'HON PATRIC NORMAN MCHENNESSY-THE BOY WHO WAS ALWAYS LATE>이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언제나 늦는 소년. 늦는다는 것은 시간 앞에서는 지각으로, 경쟁 앞에서는 순위로 표현된다.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시간과 경쟁일 것이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남들보다 앞서는지, 오직 질주의 본능에만 열광하고 있다. 존은 이런 사회에 잔잔한 질문을 던진다. 한 짝 뿐인 장갑과 찢어진 바지 같은 가시적인 현상 말고 왜 늦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에 관심을 가져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