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갈래로 뻗어나가는 인생 가운데, 살아낼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의 생뿐이다. 어쩌면 인생은 살아남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어쩔 도리 없는 사건이 생에는 수두룩하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잘못된 선택은 우리를 궁지로 내몬다. 나를 재단하는 촘촘한 눈들로 둘러싸인 자의식 지옥에 갇히기도 한다. 그중 가장 엄격한 시선으로 나를 옭매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생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슬픔 하나 없는 기쁨의 생이 아니라, 숱한 실패를 딛고 마침내 성공에 이른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도무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되지 않는 생의 진실을.
이슬아 작가는 산문집 <끝내주는 인생>에서 증조할머니 고순남씨를 통해 자신의 유래를 찾아본다. 마술 같은 재주와 귀신같은 솜씨는 고순남에서 이슬아로, 100년의 시간을 거쳐 연결되고 반복된다. 유년기를 돌아보다가 어떤 일이 좋은 일이었는지 안 좋은 일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은 하나이며,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맞닿아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는 두 가지를 동떨어진 것처럼 다루지 않는다.
큰 나무를 기르던 이슬아의 손 큰 친구는 사기를 당하고 빚더미에 앉는다. 친구가 작은 집으로 이사가면서 이슬아는 큰 나무를 넘겨받는다. 이슬아는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이파리를 마요네즈와 맥주로 닦아주며 친구들과 함께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오랜 친구 앞에서 이들은 한껏 솔직해지고, 무너지기도 하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한다.
어딜 가나 환대받던 스타작가 이슬아가 군부대에서 열리는 북콘서트를 수락했다가 곤혹을 느낀 일화가 인상적이다. 너무 낡아서 발 디딜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빨간색 부직포가 깔린 군부대의 무대에 오르며, 작가는 사랑과 용기에 취해 강연뿐 아니라 공연까지 수락한 자신을 원망한다. 이슬아가 누군지 관심조차 없는 삼백 명의 소란한 용사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노래까지 부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구석에 앉은 한 용사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옆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집중하면서. 여리고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담으려는 것처럼. 그런 얼굴로 소리를 듣는 건 그 사람뿐이었다. 용사를 발견하고 ‘오직 한 사람이 중요해지는 순간’에 대해 깨닫는다.
하나의 고생을 지나면 또 다른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고. 그중에서도 어떤 언니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끝내주는 인생이었다고. 그 언니의 말을 들으면 너무 용기가 나서 막 웃는다. 나는 내가 고생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농담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희망한다. 임종 직전에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인생이었어.” - p. 218
이슬아 작가는 2018년 연재 프로젝트 ‘일간 이슬아’로 찾아가는 작가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돈을 내고 자기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구독료를 내는 회원들을 모집해 매일 글 한 편을 보내주는 구독모델을 창안했다. 매체의 청탁을 기다리는 대신 독자를 향해 돈을 주시면 제가 글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동안에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직접 글을 판매하는 모델이 없었다. 이슬아 작가는 스스로 상인의 딸이기도 하고 뭔가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것을 파는 건 숭고한 일이기도 하다며 '일간 이슬아'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끝내주는 인생>은 지난 5년 간 글쓰기 세계를 확장해 온 이슬아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스물 세 편의 산문이 실려있다. 이 중 한 편은 이훤의 사진 산문이다. 책의 처음을 장식하게 된 이훤 작가의 사진은 텍스트 없이 사진만으로 한 편의 산문을 완성하는 시도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끝내주는 인생’의 순간들을 포착했고, 여덟 장의 사진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이슬아 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관찰력과 주변을 살피는 섬세함, 항상 열려있는 귀, 그리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재미있다.
매일 마시는 아메리카노 대신 오트밀 라테를 시도해 본다. 무언가 시원치 않아 원두를 바꿔보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원래 즐겨마시던 아메리카노로 돌아간다. 최고의 맛을 찾아 이리저리 노력해보고 잔잔한 실패를 맛보기도 하는 내 인생이야말로 끝내주는 인생이 아닐까. 사소한 일상도 의미를 부여하면 서사가 된다. 누구든지 지금, 끝내주는 인생을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