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을 읽기 힘들고,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진득하게 끝까지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몰입의 즐거움을 맛본 지 오래다. 미국의 10대들은 한 가지 일에 65초 이상 집중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비단 10대들만의 문제일까.
<도둑맞은 집중력>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우리의 집중력이 붕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책의 영어 제목은 'Stolen Focus',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집중력은 알고 보면 누군가가 훔쳐간 것이다. 도둑은? 실리콘 밸리 IT기업들이 범인이다.
요한 하리 작가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집중력 문제가 현대 사회의 비만율 증가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정크푸드를 중심으로 한 식품 공급 체계와 생활 방식의 변화가 비만율 증가를 만든 것처럼, 집중력 위기의 광범위한 증가도 현대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유행병과 같다는 것이다.
<도둑맞은 집중력>은 우리의 집중력을 망가뜨리는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를 공격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알고리즘 자체는 죄가 없다. 알고리즘의 목적은 단 하나, 사용자로 하여금 계속 스크롤을 내리도록 만드는 일 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뉴스에 끌린다. 뉴스 타이틀이 유독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이유다. 소셜 미디어들은 이런 인간의 취약한 고리를 파고들면서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뉴스를 추천한다. 그래야 계속 스크롤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주 분노 상태에 빠진다. 살인, 사형, 고소, 강간 등 단어를 매일 접하고 있다. 곧 이성적 사고는 마비되고 “저런 쳐죽일 놈, 똑같이 당해라!” 같은 분노만 확산된다.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분노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평소만큼 집중하지 못하며 정보 처리의 깊이가 얕아진다고 말한다. 요컨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분노를 일으키는 뉴스를 부각하고, 뉴스 제공자들은 그런 알고리즘에 부응하는 뉴스를 점점 더 많이 생산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분노의 알고리즘에 길들여진 대중은 점점 더 자극적인 뉴스를 찾고, 진득하게 무언가를 들여다볼 기회를 빼앗긴다.
우리 모두는 헛소리를 증폭하는 시스템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정신줄을 놓으면 하루에 서너 시간씩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해지는 것이 흔히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에 대해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혹은 ADHD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못난 내 모습에 실망한다. 그렇다면 헤어 나올 방법은 없을까?
우선 잠을 충분히 자자. 잠을 자는 동안 뇌에서는 일종의 청소가 벌어진다. 뇌척수액이 낮 동안 머릿속에 쌓인 독성 단백질을 청소하는, 일명 브레인워싱을 부지런히 실행하는 것이다. 18시간 이상 깨어 있을 때는 거의 술에 취한 것처럼 뇌가 기능을 하지 않는다. 부족한 잠은 우리를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컨디션으로 만든다.
멀티태스킹 환상에서 벗어나자.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동시에 TV를 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TV만 보다가 음악만 듣다가 글을 보는 식으로 우리의 집중이 자주 옮겨가는 것일 뿐.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 집중이 분산돼서 효율성은 더욱 떨어진다. 멀티태스킹이 마치 유능한 사람만 해낼 수 있는 천재적 능력으로 추앙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잔혹한 낙관주의를 경계하자. 이미 사회가 이렇게 디자인되어 체제가 가동되고 있는 동안에는 개인의 힘만으로 비만율이나 SNS 사용률을 쉽게 줄일 수 없다. 자기 습관을 바꾸겠다는 허황된 목표보다는 감시 자본주의를 금지하고, 주 4일제를 도입해야 하며,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되찾도록 하는 대담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희망은 있다. 집중력의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다시 없앨 수 있다. 깊이 사고하는 능력을 영영 잃기 전에 요한 하리 작가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오랫동안 우리는 자신의 집중력을 당연시 했다. 마치 집중력이 가장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선인장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집중력이 선인장보다는 난초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난초는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말라죽을 것이다. - P.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