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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Nov 14. 2023

친밀한 이방인



 


최근 흥미로운 드라마 한 편을 봤다. 재주 많고 똑똑하지만 집안이 가난한 여자, 결핍과 욕망을 동시에 가진 여자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 특별해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안나'이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하지만 진실은 단순하고 거짓은 복잡합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활자로 표현한 모든 것은 정제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눈으로 보면서 한 번 걸러지고, 소화시켜 글로 옮기며 여러 번 정제한다. 오로지 읽는 사람이 나 자신뿐이라 하더라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타자가 된다. 일기 속 기록도 타자화된 삶인 셈이다.  


이 드라마는 정한아 작가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다.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광고를 발견한 소설가가 있다. 자신이 대학생때 만든 미출간 소설 <난파선>의 원작자를 찾는다는 광고였다. 이 광고를 올린 사람은 실종된 남편을 찾는 여인이었다. 자신의 소설을 훔친 비밀스러운 인물 이유미가 직업과 신분을 바꾸고 심지어 성별까지 여러 번 바꾸면서 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유미가 마지막으로 훔쳤던 인생의 실제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이유미의 일기장을 추적하며 소설은 전개된다. 


세 남자의 아내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이유미. 그녀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대학교수이기도 했다가 요양병원의 의사로, 그리고 소설가 행세를 하며 삶을 변주한다. 일기장을 통해 '이유미, 이안나, 이유상, 엠'이 되어야 했던 그 여자의 삶을 따라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일기장을 다 읽어도 속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유미는 대학 입시에 떨어진 순간부터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가짜의 삶을 살아간다. 거짓왕국은 매혹적이다. 거짓 증명서 한 장으로 권위와 삶의 안정감, 사랑, 돈, 심지어는 세상의 호의까지 얻게 된다. 이유미라는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조건에 따라 그를 달리 보고, 이유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점점 더 커지는 거짓말을 막지 못한다.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돌파하거나 저질러버리는 습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있으면 타인의 신뢰를 쉽게 얻고, 그것을 기반으로 관계 형성이 가능해진다. 이유미는 자기의 출신과 계층을 벗어나기 위해 전문성을 위증한다. 증명서들이 요구하는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한다. 거짓말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외로운 노력을 계속하는 유미의 삶이 한편으로는 슬퍼 보인다.  

그녀가 만든 이미지 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때 이유미는 떠날 채비를 했고, 곁에 있던 남자들은 그녀에게 실망했다. 이유미는 생각한다, 그들이 이유미의 거짓말에 실망을 한 것인지, 아니면 원하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어서 실망한 것인지.  


어디를 가나 친밀한 사람이지만 이방인인 이유미. 소설이 인터뷰로 구성되는데, 인터뷰이들이 이유미에 대해 추억할 때, 따뜻하고, 친절하고, 자상했으며, 화려하지만 겸손하고 여성스러웠다고 회상한다.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그리움이 베어난다. 관계 안에서 이들이 감정을 교류했기 때문일 것이다. 꼭 진실과 거짓으로 양분해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인간관계에서는 있다. 심지어 실연을 당하고 사기를 당했어도 어떤 부분은 진실되게 기억하듯이. 


변장과 거짓으로 살아온 삶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유미의 거짓말은 때로 누군가를 구원했고,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되었다. 작중 화자인 소설가는 세계가 모두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한다. 어쩌면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자신이 생각한대로 믿어버리고 싶어 할지 모른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상대방을 자기 편한 대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유미뿐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거짓말을 한다.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왜곡한다. 생존방식의 하나로 거짓말을 택한다. 정한아 작가는 거짓이 거짓을 낳는 비틀린 사회를 꼬집으며 인간의 허영이 이르는 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스스로를 숨기고 부정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평범하게 걷고 있는 길 위의 풍경처럼 그들의 결혼생활도 그랬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 p.133 


멀리 드라마, 소설로 갈 것도 없이 뉴스만 봐도 그렇다. 전청조는 희대의 사랑꾼인가, 사기꾼인가. 성별까지 바꾸고 인생을 날조해서 그가 진짜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은들 만족했을지 의문이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아사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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