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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Nov 29. 2023

ALONE



 


원고 마감을 하루 앞둔 날. 성실하게 일해 놓지 않았던 탓에 데드라인을 코앞에 두고 새벽까지 벼락치기 마감을 하고 있었다. 타닥타닥 다급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연두색 기다란 사마귀가 방안을 뛰어다닌다. 급한 대로 커다란 머그컵을 가져와 덮었다. 컵 안에서 사마귀가 분주하게 뛰고 있나보다. 푸드덕거리는 괴기스러운 소리가 났다. 이곳은 도심 속 주택가. 늘 사람에 둘러싸여 사람과 복작이며 살고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문득 외로웠다. 머그컵 속 사마귀는 계속 날뛰고, 나는 외로웠다. 사마귀가 지쳐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세상은 혼자구나.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마친 후. 아마도 추석을 보낼 직후였던 것 같다. 일상을 사느라 바빠서 못 느꼈던 외로움이 한 주를 마감하는 일요일 밤에 한꺼번에 몰려왔다. 바스락 시원한 촉감이 일품이라는 시어서커 이불에 누웠다. 우주의 광활함이 느껴졌다. 영화 '그래비티'의 라이언 스톤 박사처럼 바스락거리는 이불 위에서 넓은 우주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면 광활한 우주 속 미아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침대 끄트머리에서 한없이 몸을 웅크렸다. 


외로움. 이 세 음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함부로 꺼내놓기 어려운 감정이다. 시시때때로 우리는 처절한 외로움을 겪는다. 외로움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기에 더 외롭다. <ALONE>은 스물 두 명의 작가들이 쓴 외로움에 관한 고백이다. 화가이자 작가인 나탈리 이브 개럿이 내용을 엮었다.  


인도 벵골 출신의 부모에게서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퓰리처상 수상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와 영국, 미국, 그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남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책에서 본 미국 가정의 모습은 자신의 가족과 많이 달랐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도 달랐고, 기념하는 명절도 달랐으며, 조바심을 내거나 신경 쓰는 부분도 전혀 달랐다. 이민자 가족이 겪는 이질감과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멜리사 페보스 작가 사연이 드라마틱하다. 레즈비언인 페보스는 연애를 쉬어 본 적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혼자 지내기로 결심하고 런던행 비행기에 오른다. 헝클어진 머리에 비니를 쓴 여자가 자꾸 거슬린다. 세관심사 줄에서도, 기차역에서도 계속 마주친다. 그때마다 둘은 서로를 의식한다. 누가 먼저 말을 거냐의 문제이지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만 같다. 페보스의 이야기는 유머러스하고 밀도 있게 쓰인 한 편의 촌극이다. 결말이 궁금해 견딜 수 없고, 무엇보다 이 소동이 모두 외로움 때문에 빚어진 일이어서 작가와 깊은 공감대가 생긴다.  


만성질환을 겪으며 병원에서 홀로 지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 유산 후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보는 동안 들여다보게 된 자신의 마음, 홀로 자신을 키우던 어머니를 잃어버릴까 공포에 떨었던 유년 시절에 대한 회고 등 참여한 작가들이 각자 다른 주제, 다른 방식을 채택한 것이 특징이다. 각기 다른 이유로 시작된 고독의 모습이 우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독의 순간을 통해 내면이 다시 차오르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작가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들은 쉽게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나만 그런가'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혼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 무수한 인간관계들 속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들의 외로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속 깊은 친구의 위로처럼 다가온다. 


<ALONE>을 읽을 때 나는 태평한 상태였다. 다르게 말하면 스산하게 외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책은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칼럼에 소개한 것보다 훨씬 차분하고 서정적인 위로의 문장들도 많다. 이렇게 다양한 맛이 섞여 있는 선집이라니.  


다른 사람이 이해하거나 안심할 수 있게끔 애써 표정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없는, 혼자 고요히 머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이 책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타인과 연결을 꾀하느라 느슨해진 나 자신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여성이 진짜 혼자 남겨지게 되면, 슬픔에 빠졌거나, 사랑할 상대나 가족을 꾸리는 데 실패했거나, 안정적인 삶을 사는 데 문제가 있거나 하는 일종의 위기들이 빚어낸 결과인 것처럼 그려진다. 여성으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호사스러운 삶을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전제와 기대라는 틀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 '기묘하고도 힘겨운 기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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