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은/ 서른일곱 살인데/ 농부다/ 서울에서 대학도 나왔다/ 공부 못했지?/ 내가 물으면/ 웃는다”’ - p. 52
시를 읽으면 당돌한 조카와 허수아비처럼 허허 웃는 외삼촌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학창 시절에 늘 들은 말, “공부해라, 공부 잘해야 한다!” 구구단 대신 그림이나 피아노, 별자리를 좋아하면 문제아로 불렀다. 그런데 살다 보면 공부 못해도 성공하고, 공부 잘해도 실패한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본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나중에 선택지가 넓어지고 다양한 기회들이 더 쉽게 주어지는 건 맞지만 공부가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곽재구 시인의 동시집 <공부 못했지?>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잘하는 것을 해나가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모두가 공부 잘하는 세상이 아닌, 다양한 취향을 가진 아이들로 모인 세상이 시인이 바라는 세계다.
일흔이 다 된 원로 시인이 등단 이후 처음 세상에 내놓은 동시집이다. 어린이에게 꼭 전하고 싶은 생각들이 있어 그러모았다고 한다. 어른의 눈이 아닌,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 구절들이 소복소복 쌓였다. 가족, 나, 친구,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4개의 주제로 61편의 시를 담았다. 여기에 그림 작가 펀그린이 알록달록 예쁜 그림을 44점 붙여 줬다.
책 속 화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서 사는 아이이다. 구구단을 외우는 일은 수학 공부를 위해 중요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흘이 지나도 3단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 엄마가 걱정한다. "사흘이 지나도 3단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니 부끄럽구나"라고 말한다.
아이는 엄마가 여고 시절에 읽은 낡고 노란 세계 문학 전집을 좋아한다. 오래된 책 냄새 속에서 여고 시절 엄마 냄새를 맡기도 하고 엄마와 아빠가 처음 만난 사랑 이야기를 책으로 쓸 생각을 한다. 도자기 공방에 가서 컵을 만들고 좋아하는 곰돌이 푸 아저씨 그림을 그린다. 도자기가 구워지기 위해서는 온도가 1000도가 넘는 가마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뜨거운 불을 푸 아저씨가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기도 한다.
겨울밤, 낮에 만든 눈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밤새 방에 불을 켜두고 쇼팽의 녹턴을 들려주기도 한다. 공룡의 머리뼈만 보아도 공룡 이름을 다 말할 수 있고 밤하늘의 별자리 이름도 척척 안다. 길고양이를 위해 동시를 쓰기도 하고 지렁이와 개미의 삶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보인다.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이 아이에게 당장 구구단을 외우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아이야말로 오늘날 세계가 바라는 이상적인 아이일 수 있다.
곽재구 작가가 생각하는 멋진 아이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아이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과 꿈,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아이. 그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 푹 빠져 사는 아이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런 아이들이 세상의 학교와 운동장과 도서관과 공연장을 바글바글 채우는 꿈을 꾸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 꿈으로 가슴을 채운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공부만 하고 살아온 어른들은 '그때는 공부가 최고였다'라고 말한다. 전쟁도 이겨내고 가난도 이겨 내면서 출세하려면 공부밖에 길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인정한다. 그 덕분으로 지금 우리들이 있는 거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학교는 공부만 열심히 한 어른 세대 학교 풍경과 사뭇 달랐으면 좋겠다. 학교가 아이들의 꿈을 만드는 놀이터가 되었으면 싶다. 대학의 시험도 과목별 점수의 합이 아닌 이 수험생의 잠재된 가능성과 성장 가치에 비중을 두고 선발하면 어떨까. 현실은 어렵지만 영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학과 성적이 뛰어난 아이로 채워진 학교보다 꿈을 가진 아이들이 서로의 꿈을 키워가는 알록달록한 학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췄지만 어른이 함께 읽기를 권한다. 한 번에 다 읽기 아까워 매일 하나씩 꺼내 먹고 싶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