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태국 소년 12명이 물이 찬 동굴에 갇혔다. 이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타기 시작하자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소년들을 응원했다. 같은 해 예멘 내전 중 굶주림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어린이 8만5천명에 대해서는 훨씬 적게 보도됐다. 아이들은 관심 밖에서 죽어갔다.
이렇게 보도 횟수가 상반된 이유는 명백하다. 태국 소년들의 구출 이야기는 그들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모두 생존해 돌아왔다. 소년들이 갇혔던 동굴은 이제 매년 100만 명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반면 예멘 어린이들 사건은 상징적인 개별 사건이 없었고 저널리즘적 연출이 불가능했다. ‘구원’ 서사가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
경쟁, 복수, 사랑, 구원 등과 같은 서사는 비단 영화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나누던 원시 시대부터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이야기를 퍼 나르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왔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인 우리는 이야기와 함께 성장하고 이야기와 함께 묻힌다. 정치, 전쟁, 뉴스, 교육, 광고 등 모든 것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허구든, 사실이든 정보가 교환되고 퍼지는 곳에 서사 구조가 있다.
독일 칼럼니스트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 왜 우리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한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이야기에 기대어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한 답을 알려준다.
서사 형태는 크게 6가지이다. 가난뱅이가 백만장자가 되는 이야기, 주인공이 끝없이 추락하는 이야기, 구덩이에 빠졌다가 탈출하는 이야기, 한참 상승한 뒤 추락하는 이카로스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고난 속에 성공하는 신데렐라 이야기, 처음에는 강한 타격을 받았다가 중간에 상승하지만 결국 비극을 맞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다.
이 중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가장 큰 수익을 얻은 이야기는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난관에 처했다 이를 극복해내는 맨인홀 구조와 신데렐라 스토리였다. 선사 시대에 한 사람이 자신이 사냥 중에 겪은 위기의 순간을 부족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는 거대한 살쾡이를 마주쳤다. 살쾡이가 공격하자 그는 나무와 돌로 만들어둔 창을 살쾡이 쪽으로 던졌다. 창은 부러지고 그는 팔에 상처를 입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도망친다. 나무 위로 도망치려 하지만 다친 팔로는 역부족이다. 폭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계속 달리다가 절벽 끝에 다다랐다. 공격할 힘도 없이 녹초가 된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절벽 아래로 뛰어든다. 몇 초간의 자유 낙하 끝에 그는 차가운 수면 위로 떨어진다. 그는 죽었을까? 아니다. 그는 깊은 물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숨을 헐떡인다. 해냈어!
부족 사람들은 흡사 오늘날의 액션 영화와 같은 이런 탈출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적과 만났을 때 무기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고 폭포 아래 물속은 비상시에 뛰어들어도 될 만큼 매우 깊으며 절벽에 뛰어내리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등의 중요한 정보와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성공적인 생존 전략과 정보를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이야기가 지닌 힘은 위대하다. 1978년 미국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 ‘홀로코스트’는 이야기가 지닌 엄청난 변화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리즈가 방영된 이후 독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기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전 세계인의 기억도 완전히 바꿨다.
이제 우리에게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배경에는 지구온난화가 있었다. 영화 ‘워터월드’와 ‘투모로우’ ‘설국열차’ 모두 황폐해진 지구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구온난화는 이야기의 배경이 될 뿐, 이것을 제대로 다룬 서사는 없었다. 물론 이유가 있다. 극적 요소를 부여하려면 뚜렷한 적대자가 필요한데 기후변화는 인류 모두의 책임이 있어 적대자를 명시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이야기는 삶을 구할 수 있고 투표 결과를 좌우할 수 있으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또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사람들을 영원히 반목시킬 수도 있다.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 세상에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할까?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왜 우리는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할까? 디스토피아가 더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두가 모든 것을 가진 유토피아는 지루하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흥할 수도, 망할 수도 없으며 그저 존재할 수만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다.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p.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