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Apr 22. 2024

저주토끼


 


뒤늦게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를 읽었다. 전미도서상 번역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도 오른 저명한 작품인데 어쩐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이하고 으스스한 잔혹동화 느낌이 강해서일 것이다. 


소설집은 SF와 공포를 넘나드는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억울하게 몰락한 친구의 원한을 갚기 위해 대대로 저주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저주토끼를 만들어 복수에 나서기 시작한다. 저주토끼는 손자를 시작으로 원수 삼대를 몰락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속담처럼 할아버지에게 화가 몰려오는데... 


왜 하필 토끼일까? 환상호러 웹진 '거울'에서 정도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2015년 말, 동양 전통의 12지신 가운데 한 동물을 정해서 각자가 소설 한편씩을 쓰는 특집을 진행했다. 개나 돼지, 용, 호랑이 등 멋있거나 익숙한 동물은 이미 누군가 선택했고, 그에게 남은 건 양과 토끼뿐이었다. 동물 중에서 거의 최약체여서 무기가 될 것이 없는 토끼를 선택했다. 예쁘고 귀여운 동물이어서 반대로 최대한 무섭게 만들고자 작정했다고 한다. 토끼를 소재로 하되, 과거 쓰레기 만두 파동으로 억울하게 파산한 회사 이야기와, 군사독재 시절 쌀 자급자족을 위해 쌀로 전통주를 빚는 양조장의 맥이 끊길 뻔한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구성했다. 


이야기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저주토끼>는 저주용품을 만드는 것이 가업인 집안을 배경으로,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손자가 듣는 액자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저주용품이라고 하니 사악한 기운으로 들끓을 것 같지만 사업을 운영하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용품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  


하지만 딱 한 번, 예외가 생긴다. 저주용품을 만든다는 이유로 천민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인 양조장집 아들이 경쟁 업체의 비열한 수법에 말려 사업이 망하고 자살하게 된 일이다. 할아버지는 친구를 죽게 한 경쟁 업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저주용품을 만든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기이하다. 그 말은 다수가 따르고 있는 상식과 원칙에 많이 어긋난다는 뜻이다. 저주토끼가 경쟁 업체를 망가뜨리는 과정부터 그렇다. 토끼들이 밤마다 공장에 가서 종이를 갉아댄다. 회사의 자료들을 다 갉아버려 세금 납부를 증명할 길이 없어진 사장은 큰 손해를 본다. 토끼들은 사장 손자의 영혼에 들어가 죽게 만들고, 사장의 아들을 다치게 하며 끝내 삼대를 멸하게 만든다. 분명 인간에게 벌어진 일이지만 그것을 해결하기에 인간의 힘은 미약하다.   


할아버지는 부당한 힘을 벌하고자 저주용품을 쓰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집안이 저주토끼를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돈을 벌 수 있는 건 바로 부조리하게 뒤틀린 세상 덕분이다. 야비한 자본주의를 저주하지만, 그 저주마저 사업 수단으로 이용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아이러니.  


그 와중에 손자는 자식이 없어 다행이라고 자위한다. 삼대가 망하는 극단의 저주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이유는 애초에 삼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실은 다행일까, 궁극의 비극일까. 뒤틀린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은 뒤틀린 세상이 끝나는 것뿐이라는 메시지는 종말만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 p. 34 


이런 잔혹동화의 배경에는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극단적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에 가하는 소외감이 소설을 관통한다. ‘취미가 데모’라는 정보라 작가는 지금 11년 동안 시간강사로 일했던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을 청구하는 소송을 벌이고 있다. 뒤틀린 세상을 완전하게 저주하는 작품을 쓴 창작자다운 행보다. 뒤틀린 세상에서 품을 수 있는 희망은 뒤틀린 것들이 조금 펴지는 것이다. 정보라 작가의 데모가 세상을 바꾸는 다림질이 되기를 기대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