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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n 12. 2024

여름기담





공포소설의 계절이 돌아왔다. 실제로 무서운 이야기를 보면 오싹하게 느끼기 때문에 여름하면 공포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여름철 더위도 식히고 짜릿한 재미도 느끼기 위해 공포 체험을 하거나 공포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물을 소설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최근 본 책들 중 가장 눈에 확 들어왔던 표지 1위. 오마카세 소설 콘셉트로 기묘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을 카레라이스 표지에 담았다. ‘순한 맛’ ‘매운맛’ 두 가지로 독자들이 취향에 맞춰 고를 수 있게 한 점도 흥미롭다. 둘 중 하나만 추천하자면, 무조건 매운맛이다. 순하다고 생각했던 작가의 매운맛을 보고 얼얼해진 채로 새로운 취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출판사 설명에 매운맛은 “작정하고 무섭게, 독한 이야기”라고 써놨을까.  


인스턴트 카레 패키지처럼 절취선과 성분표, 영양정보, 제조일 등을 담고 있다. ‘유기농’ 인증 표시 대신 ‘유기농담’ 표시가 붙어 있는 식이다. 책날개에 적힌 조리 방법은 이렇다. '조리방법. 1. 주변을 어둡게 조성해 주세요. 2. 분신사바를 통해 읽을 단편을 정합니다. 3.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며 독서에 매진합니다.'  

소개부터 독특한 <여름기담: 매운맛>은 백민석, 한은형, 성혜령, 성해나 등 젊은 작가 4인이 참여했다. 단순히 더위를 식혀 줄 공포물이 아니라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 등 우리의 고단한 현실을 적절히 작품에 녹였다.  


공포에도 등급이 있다. 기담 속 귀신들은 꼭 질문을 던진다.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하고 묻는 화장실 귀신은 기담계의 고전으로 꼽힌다. 한때 유행한 ‘빨간 마스크’ 괴담에서는 빨간 마스크를 쓴 여자가 어린아이에게 다가와 묻는다. “내가 예쁘니?” 이런 기담이 무서운 지점은 마치 선택을 잘하면 안전하게 위기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기대를 기어이 배반하고 만다는 데 있다. 


<여름기담> 시리즈 역시 귀신의 질문이 그렇듯, 어느 맛을 골라 읽어도 등골이 서늘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매운맛의 경우 귀신과 저주, 괴물 이야기로 범벅일 거란 예상과 달리 ‘귀신보다 무서운 인간’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성해나 작가의 ‘아미고’는 가까운 미래, 휴머노이드에게 일자리를 위협받는 스턴트맨을 보여준다. 고도로 발달한 AI가 나의 미래마저 오차 없이 예측한다면 그 신적인 존재 앞에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공지능 스피커가 비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무인 우버가 상용화된 멀지 않은 미래 시대, 주인공 ‘죠’는 촬영 현장의 유일한 스턴트맨이다. 촬영 중 큰 사고를 겪은 뒤 돌아온 현장에는 사람 대신 ‘야키마 H1’이라는 로봇이 디렉터스 체어에 태평하게 앉아 있다. 과거에 그 로봇을 처음 보았을 때 ‘죠’는 괴기함과 이질감을 느꼈지만 동료들은 그것을 ‘아미고(친구)’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대기 시간에 동료들은 로봇과 나에게 스파링을 부추기고, 그때까지만 해도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던 야키마 H1은 나의 주먹에 족족 맞는다. 맥없이 쓰러진 로봇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다가갔을 때 그것은 나의 귀에 또박또박 속삭인다. “저 얼굴들을 잘 기억해 둬요. 그리울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예언대로 학습을 거듭한 로봇이 촬영 현장을 점거하고 동료들은 모두 실직자가 되었다. 다시 만난 야키마 H1은 나에게 한 번 더 자신이 예측한 미래를 말해주는데... 


주인공이 오싹함을 느끼는 건 로봇이 아니라 인간 스턴트맨을 로봇으로 착각한 것 마냥 사지로 몰아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영화계 인간 동료들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 


미끈하고 잡음 없는 삶에 익숙해진 한 인물이 이명처럼 울리는 실체 없는 두려움에 몸을 담그는 오싹하지만 마냥 남의 일은 아닌 주제이다. 성해나 작가는 불투명하고 흐릿한 무엇이 선명한 윤곽을 드러낼 때, 인간이 어떤 공포를 느끼는지 알기 때문에 호기심으로라도 그것을 함부로 들춰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통상 감사 인사를 적는 ‘작가의 말’도 이 책에서는 남다르다. 백민석 작가는 ‘공포는 현실에’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태원 참사 추모 대회 바로 옆에서 평화로운 책 읽기 행사가 열리는 기이한 풍경을 전한다. 자꾸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는 사회. 괴담과 오싹한 공포는 멀리 있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고, 나를 항상 오싹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의 행동이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이야기를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사람을 해치는 것은 항상 사람이고, 사람이 만든 제도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어놓은 불평등한 관계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끔직한 지경에 빠뜨리고, 고통스럽게 하고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한 시간에 한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무섭지 않은가? 공포는 현실에, 이 사회에, 소설의 바깥에 있다. -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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