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수국이 환한 계절이다. 어제는 산책삼아 길을 나섰다가 담벼락을 가득 메운 수국 덤불 아래 한참 서 있었다. 방울방울 매달린 꽃송이가 마치 거대한 팝콘 같아서 그 앞에 서면 꼭 팝콘을 뒤집어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잎사귀는 꼭 깻잎처럼 생겼다. 한동안은 어쩌다 바람결에 들깨 씨앗이 날아와 숲이 된 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꽃을 피우는 5월 말이 되어서야 수국임을 알았다. 유월에 들어서면 만개한 꽃의 기세도 한풀 꺾여 바닥엔 꽃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지. 아까운 계절이 이렇게 지나고 있다.
못 본 새 사람들 키를 훌쩍 넘어서버린 수풀, 바람에 실려 오는 아카시아꽃 향기, 비 그친 하늘에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 모두 망종의 풍경을 이루는 것들이다.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제철 행복>을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계절, 24절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진다. 세상에 행복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한다면 잠시 머무는 이 계절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곁에 와 손짓하고 있지만 너무 가까이 있기에 소중함을 잊고 만다. 알맞은 시절에 챙겨야 하는 작은 기쁨들, 이 책은 바로 그 제철에 대한 행복 이야기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6월은 무엇이 제철인 달일까?" 내 대답은 "나들이!"이다. 망종(芒種)은 '까끄라기(벼, 보리 따위의 깔끄러운 수염) 망' 자에 '씨 종' 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 그대로 수염 있는 곡식, 대표적으로 벼의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때라는 뜻. 모내기를 일찍 끝낸 시골집에선 이제 들깨 모종 심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매화가 진자리에 새파란 매실이 단단하게 익어갈 무렵이고, 곧 있으면 햇감자를 캘 시기가 다가오겠지. 그러고 나면 장마가 시작된다.
농부에 비하면 한량 같은 소리지만, 나도 망종 전후로 부쩍 바빠진다. 장마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챙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무엇이든 야외에서 하는 일이다. 친구와의 약속도, 일로 만나는 미팅도, 저녁 식사도, 주말의 할 일도 웬만하면 바깥을 누릴 수 있나 살핀다.
날씨와 계절에 진심인 사람에게 맑은 날씨는 천연 도파민이다. 사람도 식물과 비슷해서 해가 쨍하게 맑으면 파릇하게 살아나고, 비오고 우중충하면 시들하기 마련이다. 습도 낮고 뽀송하게 따스한 망종 무렵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부지런히 바깥을 즐겨두면 된다. 할 일이라곤 그게 전부다. 실내에 있기보다 이왕이면 바깥을 누리기. 이 시기가 금방 끝난다는 걸 아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산책하기, 자전거 타기, 카페 테라스 앉기 등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혼자서 하고 함께 하면 더 즐거운 것은 함께 한다.
5월에 접어들며 카페, 식당과 술집 등에서 폴딩 도어를 활짝 열고 야외 테이블 장사를 준비하기 시작하면 덩달아 마음이 분주해진다. 겨울에 창문을 닫아두고 있을 때는 감흥 없이 지나치던 가게들이 푸르른 나무 그늘 아래 멋진 야외 테이블을 가지고 있어 놀라기도 한다. 찌는 듯이 더워지면 이제 저 창문들은 일제히 닫히고 바깥 자리는 모기들한테나 맛집인 곳이 되겠지. 그러니 부지런히 날씨 앱을 열어 길일을 살핀다. 망종엔 우리 모두 바깥 인간이 되자. 밖으로 나가 계절을 누리자. 잠시여서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변치 않는 제철 숙제니까.
종종 이 순간의 행복에 대해 잊고 산다. 그러다 ‘꽃놀이도 못 가다니 이게 사는 건가’ 싶어 서글픈 때도 온다. ‘이게 사는 건가’와 ‘이 맛에 살지’ 사이에는 모름지기 계획과 의지가 필요한 법이다. 제철 행복이란 결국 ‘이 맛에 살지’의 순간을 늘려가는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행복은 제철 순으로 아무 대가없이 찾아온다. 김신지 작가가 이끄는 대로 이 무렵의 행복을 공들여 마주하다 보면 우리의 1년은 좀 더 나은, 좀 더 행복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우수와 경칩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가 내리고 싹이 트는 때와 개구리가 잠에서 깨는 역동적인 시기에 태어나 이 땅의 공기를 처음으로 느껴본 것이다. 그래서 따스함을 그렇게 좋아했나 보다. 봄 초입의 냄새를 맡으면 늘 가심이 일렁였다. 추위가 물러간 반가움과 기대감 같은 감정이었는데 어쩌면 삶의 첫 기억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절기에 따라 산다는 건 한 해를 사계절이 아닌 ‘이십사계절’로 촘촘히 겪는 일. 그건 곧 눈앞의 계절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기회가 스물네 번 찾아온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지금 이 계절에 무얼 하고 싶은지, 미루지 말고 챙겨야 할 기쁨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늘 살피면서 지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해마다 설레며 기다리게 되는 당신만의 연례행사가 생기기를. - 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