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 한 구절이다. 이 시에서 처음 버지니아 울프 작가를 알게 됐다. 그런데 어쩐지 이름은 익숙한데 작품은 생소하다. 유명하지만 읽히지 않은 작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191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 <밤과 낮>이다. 책은 가부장적 가족 제도 속에서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성장해 나가는 여성의 정체성을 다룬다. 배경은 20세기 초 에드워드 시대 잉글랜드, 저명한 문필가 집안의 어린 외손녀 캐서린 힐버리는 고루한 가문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캐서린에게 결혼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약혼자는 잉글랜드 남서부의 오래된 가문 출신으로 남성우월주의를 대변하는 보수적 인물이었다. 여자에게 자기가 골라준 옷들을 입도록 하고, 여자가 식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무라고, 자기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다툼 끝에 파혼을 하고 몽상적 기질이 비슷한 랠프 데넘과 결혼한다. 랠프는 여성참정권협회 간사로 일하며 당대 보기 드물게 의식이 깨인 남자였다.
청춘남녀가 결혼 상대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이른바 구혼 소설(courtship novel)로서, 처음에 짝을 잘못 골랐다가 자신에게 걸맞은 짝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인간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성숙해지는 과정과 닮았다. 소설에서 결혼은 인생의 최종 가치이자 종착역처럼 비유된다.
사랑과 결혼의 이상, 종속적 삶과 독립적 삶의 공존, 남과 여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 각자의 역할과 자유를 존중하는 관계. 제목 <밤과 낮>은 이토록 다양한 삶의 양면을 함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특히 <밤과 낮>은 버지니아 울프 작가의 전기적 소설이기도 한데, 주인공들의 구혼 이야기는 사실 울프 부부의 젊은 시절 이야기인 셈이다. 이 소재로 쓴 소설은 남편 레너드 울프의 <지혜로운 처녀들(The Wise Virgins)>(1914)이 먼저이다. 여기에 버지니아 울프는 가부장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시각으로 정체성 탐구라는 문제의식을 더했다.
울프의 작품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덜 알려진 이 소설은 가장 저평가된 작품이기도 하다. 차근히 읽어 보면 작가가 훗날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알려지는데 단초가 될 만한 단서가 흩뿌려져 있다. 에드워드 시대는 기성세대와 새로운 인식 사이에 변화가 포착된 과도기인데, 이때 유서 깊은 가문의 여성이 전통적 가치관에 맞서 고민하고 갈등한다는 줄거리만 봐도 작가가 가부장적 결혼제도와 남성 지배 문화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세상에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힐버리 부인이 말을 이었다. “평판이 전부가 아니야. 바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란다. 어리석고, 친절하고, 간섭하는 편지는 필요 없었어. 네 아버지가 나에게 말해줄 필요도 없었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그렇게 되도록 기도했단다.” - p. 634
소설로 짐작한 버지니아 울프 작가는 매우 당차고 의지가 강한 여성인 것 같지만 실제 그의 삶은 가혹했다. 외투 주머니 가득 돌멩이를 집어넣고 영국 우즈 강가에 서기까지 평생 지독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1882년 문학평론가의 딸로 태어났다. 열세 살에 마주한 어머니의 죽음, 스물두 살 때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에 우울 증세는 계속 악화됐다. 어린 시절 의붓오빠에게 당한 성추행의 기억도 그녀를 평생 따라다녔다. 울프는 평생 성과 남성, 자신의 몸에 혐오감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첫 번째 자살 기도는 결혼 직후인 1913년이었다. 이후 남편 레너드 울프가 자신을 위해 세운 출판사에서 소설을 출간했고,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소설가로 명성을 쌓아갔다. 2차 대전으로 유럽이 전화에 휩싸일 때쯤인 1941년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봅니다’라고 시작하는 유서를 남긴 채, 우즈 강에 투신해 생을 마쳤다. 59세였다. 안타까운 사실은 시신이 뒤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장례는 한 달이나 지나 치렀다. 이것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다.
한 작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참고서는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다. 울프의 초기작들은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터를 잡아 다져졌는지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올 봄에는 버지니아 울프와 달콤한 데이트에 빠져보는 건 어떻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