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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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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자란 터전을 떠나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아득할까. 이민자라면 누구나 이런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시작했을 것이다. 여기 보다 나은 삶과 기회를 쫓아 미국으로 이민을 간 1세대 가족 이야기가 있다. 라자니 라로카의 소설 <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이다.


열세 살 레하는 인도계 이민자로 미국에 살고 있다. 레하는 ‘내 삶은 둘이야. 인도 사람의 삶 하나. 인도 사람이 아닌 삶 하나’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것은 작가 라자니 라로카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다. 작가는 인도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자랐다. 지금은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의사로 살고 있다. 진료를 하는 주중에는 미국인으로, 주말에는 인도인의 삶을 오가며 틈틈이 책을 썼다.


쿠키 냄새로 가득한 피터 집과는 달리 레하네 집에서는 늘 밥 짓는 향신료 냄새가 가득했다. 급식 시간에 레하는 소고기가 들어간 햄버거나 페퍼로니 피자를 먹을 수 없다. 유행하는 청바지, 티셔츠를 입는 친구들과 달리 레하는 엄마가 만들어준 전통의상을 입고 생일 파티에 갔다. 엄마는 레하가 댄스파티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이 일을 계기로 사춘기 딸과 부모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민자 부모님에게 레하는 희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외동딸이다. 엄마와 아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레하는 의사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레하는 빨간 피만 보면 기절을 한다. 속은 울렁거리고 세상은 회색빛으로 변하는데 과연 의사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열세 살 레하는 미국에도 인도에도 딱 맞지 않는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황갈색 피부와 검은 눈동자, 그리고 구불거리는 머릿결. 이런 내가 미국 사회에서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주눅이 든다.


나는 알고 있어. 그들은 자기 피부가 자기 눈동자가 아니 그들 자체가 나랑 달라서 우쭐해 한다는 걸. - p. 41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다. 비록 피만 보면 기절할 것 같은 레하지만 자신이 엄마를 낫게 하리라 결심한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 문득 깨닫게 됐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들이 모두 완전하게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도 친구와 비인도인 친구, 엄마가 건강할 때의 삶과 아프고 난 후의 삶, 병실 안에서 가족과 함께일 때와 밖에서의 삶. 모든 세계는 하나일 수 없으니 레하는 자신을 있게 하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기로 다짐한다.


이 책은 118편의 시로 풀어서 쓴 운문 소설이다. 운율이 부드럽고 각 편의 분량이 짧아 빠르고 깊게 주인공의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독특한 점은 하얀 종이에 빨간 글자로 쓰여 있다. 바로 빨강과 하양이 합쳐 완전한 하나를 이루게 된다는 책의 주제를 표현한다. 제목 <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는 적혈구, 백혈구를 의미하고 혈액 성분까지 다 합쳐져서 완전한 혈액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 인도인과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이 두 정체성의 혼란을 딛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두 세계로 나누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두 세계가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얀 종이에 빨간 글씨로 시를 표현했다고 한다.


빨강 더하기 하양은 진달래색도 아니고 딸기우유색도 아니다. 각각의 색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데, 나는 여러 색을 지닌 매력적인 존재임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주자라는 지위는 어린 라자니 라로카 작가와 레하에게 긴장의 연속이다. 하지만 고향의 음식, 고향의 노래, 고향의 말이 주는 안도감은 고향을 떠났지만 레하를 여전히 성장시키는 동력이 됐다. 레하는 온갖 차별 속에서 자기 안의 다양한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 덕분에 더욱 풍요로운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 아이로 자란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이민자, 소수자에게만 주어지는 값진 열매다. 레하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 사는 우리 공동체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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