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하게 나이 들기. 올해부터 인생 목표를 이렇게 설정했다. 나다움을 지키며 빛나는 노년을 맞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고, 스스로 경험 해봐도 그렇다. 지침서삼아 한 유튜브채널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73세 할머니가 운영하는 채널에서 주인공 '밀라논나'는 다양한 패션팁, 인테리어팁을 전하고 어른의 시선에서 따뜻한 위안을 건네기도 한다.
밀라논나 장명숙은 이탈리아 밀라노로 패션 유학을 떠난 최초의 한국인이자, 1986년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의상 디자이너 등을 맡았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페라가모와 막스마라 등 이탈리아의 유명 브랜드를 한국에 처음 들여온 문화 코디네이터이자 패션 컨설턴트로 40년 넘게 현업에서 일했다.
유튜브를 처음 개설했을 당시에는 구독을 부탁하면 신문처럼 돈을 내야 하는 줄 알고 염치가 없어서 차마 구독해달라는 말도 못 꺼냈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구독자 수도 챙겨보고 “구독, 좋아요, 눌러주세요” 하며 애교도 부리게 되었다. 밀라논나 유튜브는 3년 전 잠정 중단했다가 지난 여름에 복귀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많이 반가웠다.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는 산뜻하고 유쾌한 할머니가 되기 위해 여전히 고민하는 52년생 장명숙과 82년생 밀라논나 채널 제작자 이경신이 함께 쓴 책이다. 제목은 나만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살자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며 살자는 의미라고 한다.
처음에는 PD와 아티스트로 첫 인연을 맺었지만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스승과 제자, 어머니와 딸, 인생 선후배, 친구로 관계가 바뀌었다. 이 책은 이경신이 인생 전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장명숙이 답을 하는 대화체로 써 내려간다.
나이 들기, 다스리기, 말하기, 생각하기, 입고 먹고 말하기, 함께 일하기, 사랑하기 등 7가지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나를 지키고, 어떻게 너를 대하고, 어떻게 즐기며 살 것인가” 대해 나눈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던져보는 질문들이다.
나이가 들어 비로소 인생과 연애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밀라논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젊은 친구들의 질문을 받으면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잘 늙어가고 있을까?” 자문해 봤을 때 밀라논나는 문득 괜찮게 늙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나이와 경력에 대해 꼬집어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완벽한 사람이란 모든 면에서 실수 하나 없는 무결점 인간인줄 알았다. 일을 오래 해서 경력이 쌓인 전문가면 으레 무결점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밀라논나는 부족하고 미흡한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 진짜 경력직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자신을 들볶지 말고 자기 한계를 긍정할 때 자존감이 회복된다고. ‘이래야 해’라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발목 잡히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익히 들은 말일 수 있지만 정말 그렇다고. - p.82
두 사람은 아름다운 나이 듦, 자기 연민이라는 덫에 빠지지 않는 것, 불안이라는 알람이 울릴 때 대처 방안 등에 대해 대화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표현, 데이트 폭력, 비혼, 부모와 자녀의 관계, 경제적 자유의 의미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
또 지친 마음을 위한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 하며 감자밥전과 김밥 레시피를 공유한다. 40년 째 같은 치수의 옷을 입는 밀라논나의 건강 관리법도 소개한다. 이런 대화를 격의 없이 나눈 이경신 PD가 새삼 부럽다. 동시에 내 옆에도 이런 어른이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밀라논나 말마따나 어떤 삶에도 햇빛이 닿으면 그늘지는 부분이 생긴다. 그늘을 끌어안아야 삶이 완성된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이 뭐냐’는 질문에 ‘두려움이 사라졌다’ 고백하는 그의 비결은 짐작건대 이러한 삶의 태도 덕분이리라. 그것이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대를 향한 열린 마음을 지닌 밀라논나 장명숙을 만들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