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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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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닿을랑 말랑 높은 찬장에 크게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곱창김을 꺼내 한장 한장 참기름을 입혔다. 기름을 잔뜩 머금어 반질해진 김을 달군 팬에 굽고 가는 소금을 후두둑 흩뿌린다. 고소한 기름향과 청량한 바다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 곱창김과 함께 먹을 흰쌀밥도 밥솥에 안친다.


찬장에 곱창김이 가득한 이유는 한국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김에 제철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부모님은 제철에 수확해 깨끗하게 말린 최상급 김을 보면 딸 생각이 난다고 하신다. 손만 뻗으면 닿는 가까운 곳에 언제나 있는 김은 나에게 특별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식재료였다.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멀어지게 되는 가족처럼 말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모두 안다고 착각하지만 절대 밑바닥 이야기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고,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쉽게 상처 주는 친밀한 공동체 가족. 아직도 여전히 어렵지만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 덕분이다.


작품들은 자신처럼 미국으로 이민 온 인도인들의 삶을 주로 다룬다. 작가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야만 굴러가는 가족의 비밀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표제작인 <그저 좋은 사람>의 주인공 수드하는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사실은 동생이 어째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낙오자가 되어가는 남동생의 삶에 개입하려 하지만 상황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구제하려는 시도가 과연 가능한지 묻는다.


인도의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이민자 1세대 부모와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이민자 2세대 아이들은, 인도 아이로 남는 것과 미국 아이로 커가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태로움을 겪는다. 부모는 아이가 벵골 어를 쓰고 쿠르타를 입기를 바라고 금요일 밤 파티 같은 미국 문화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길 바라지만, 그랬다간 그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바보가 될 뿐이다. 이런 갈등에 눈감은 채 어떻게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허위의식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그는 몸을 숙여 바닥에 있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더니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잔이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지 않아도 돼, 누나. 언제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 p. 171


얼핏 이민자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의 면면이다. 본국의 이념과 생활방식이 몸속 깊이 배인 부모 세대와의 갈등으로 비치는 많은 문제들은 사실 이민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집에서나 맞닥뜨리는 갈등이다. 한 처마 밑에서 너무 오래 서로를 알아왔던 보통의 인간들 이야기일 뿐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낯선 미국에 와 살면서 친족이 있는 인도를 다녀오곤 하면서 시달렸을 이방인의 멀미증을 살며시 눈을 감고 가늠해본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던 인도 출신의 사내, 그녀의 아버지가 느꼈을 이방인의 긴장감과 서글픔도 헤아려본다. 이렇게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에 공감하며 소설을 읽어 나가다보면 우리가 겪는 일상 속의 비극들은 가장 가깝다 여기는 관계 사이의 몰이해 때문이라는 명제를 깨닫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상처를 주고받고 후회를 거듭하는데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 내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역시 사랑임을 주인공들의 실패를 통해서 배운다.


줌파 라히리 작가의 단편을 처음 읽었던 몇 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때보다 지금의 감흥이 더 깊다. 내가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그만큼의 시간을 더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의 자식을 품에서 놓아 보내듯, 부모의 삶이 나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 때도 온다.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찰하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그래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삶의 어떤 상처가 작가를 관찰자로 밀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상처 덕분에 우리는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작가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연민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담담하게 전한다. 불가능한 소통이 극에 달한 순간,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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