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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은 기분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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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좋은 계절이다. 가뿐하게 얇은 반팔, 반바지만 입고도 충분하다. 맨 살에 닿는 포근하고도 시원한 바람 감촉이 좋다. 심지어 팔에 내려앉는 꽃가루마저 보드랍게 느껴진다. 이게 바로 5월의 매력이다.


달리다 보면 매번 누군가가 나를 추월하곤 한다. 또 조금만 힘을 내면 금방 따라잡을 것 같은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 무리해서 페이스를 올렸다가 방전되어, 원래는 달려야 할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누군가로부터 추월당한 적도 없으며, 내가 누군가를 추월하는 일도 없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우리는 그저 달리는 지면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 p. 154


요조의 산문집 <만지고 싶은 기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읽자마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사람과 부대껴 달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상황을 공감할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상금 주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승부욕이 발동해 눈앞의 저 사람을 기어이 제치고 말겠다는 목표의식이 생긴다. 곁에 바람잡이 페이스메이커가 함께 달려준 덕분에 얼떨결에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달릴 때 중요한 원칙은 눈앞의 타인에게 완전히 신경 끄기이다. 너무나 뻔한 기술이지만 제법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나만의 속도로 내 심장박동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앞설 때의 우쭐함도, 뒤처질 때의 분함도 그저 그 순간이 잠깐 만들어내는 정확하지 않은 가짜 감정이다. 나이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누군가보다 젊다고 해서 우쭐할 일도, 누군가보다 늙었다고 해서 비참할 일도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요조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시각이 좋다. 특히 소통으로써 만짐의 행위를 소개하는 대목이 인상적인데, 작가는 손을 만지고, 어깨동무를 하고,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등을 때리고, 만나고 헤어질 때 오랫동안 꼭 안으면서 서로의 몸이 닿는 것에 주목한다. 가까운 사이의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만짐이란, 다정한 동시에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짐은 동물과의 교감에서 결정적이다. 우리 동네 핵인싸 강아지 달시는 누구나 눈만 마주치면 꼬리를 흔들고 앞발로 긁는다. 처음에는 멀리서 전력질주로 달려오는 강아지가 무서웠다. 주인을 지키는 마음이 충직한 강아지가 주인 아닌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걸까 생각했다. 몇 번 겪어보니 달시의 행동은 놀자고 반기는 행위였다. 다가와서 킁킁 냄새를 맡고 손을 내밀면 핼짝핼짝 핥는 몸짓이 묘하게 평화롭다. 눈높이를 맞춰서 앉으면 내 무릎에 앞발을 턱 올려놓고 웃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도파민이 아닐까.


그마저도 이렇게 마음 놓고 지나가는 개를 만질 수 있는 것도 얼마 안됐다. 한동안 허락되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거리 두기와 비대면의 시대를 살며 친밀한 사이에서도 만짐의 행위는 자제해야 했다.


2020년 이후 관계와 만짐, 거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친근하고 자유롭게 만질 수 있었던 날들이 얼마나 햇살 같은 축복인지, 서로 몸이 닿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이 얼마나 활력이 되는지 책을 읽으면서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마스크를 벗은 채 옹기종기 앉아서 음식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시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가. 익숙하다고 소홀히 대하지 말고 매일을 귀하게 여기자고 다짐한다.


작가의 시선 끝에는 늘 아름다움이 있다. '과연 농락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일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존재가 지닌 고유의 개성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주로 지느러미를 출렁이는 물고기, 누군가의 다소 독특한 이름, 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간 무주의 자연 등이다.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다만 존재하기에 흘러나오는 행동 또는 멋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관찰이다. 글마다 따스함과 사랑이 배어 있는데 특별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라기보다는 타고난 성정이 뭉근하고 성실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인생 계획을 조금 수정하려고 한다. 관심 가는 대상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특별함을 찾아내 자세히 써 내려가기. 그렇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보려 한다. 평범한 순간을 다르게 인식하는 렌즈야말로 나만의 고유한 장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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