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이 유명인이라면?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자랑스러운 마음 반, 피곤한 마음 반일 것 같다. 집에서 보는 모습과 방송이나 SNS에서 비쳐지는 모습의 간극 때문에 피식 코웃음이 나오기도 할 테다.
여기 유명인의 중학생 자녀가 겪는 일상을 보여주는 책이 있다. 정이현 작가의 소설 <하트의 탄생>에는 열다섯 살 주민이와 화려한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엄마, 아빠가 등장한다. 엄마가 광고하는 떡볶이 키트로 식사를 하고, 마누카 꿀을 먹으며 외모도 성적도 평범한 자신이 어쩐지 부끄럽다.
주민이는 사는 게 즐겁지 않다. 학교에선 예쁘지 않고 개성도 없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집에선 엄마에게 외모와 성적을 지적당한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거나 마음껏 엄마 카드를 써도 혼나지 않는다는 친구들이 부럽다. 가끔은 마음 편해 보이는 친구네 강아지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공상의 끝에 마주하는 건 어김없이 다시 현실이다.
주민이의 유일한 낙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슬라임을 가지고 놀면서 신세를 한탄하는 영상을 올리는 것이다. 물론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닉네임 '블루하트'라는 이름으로. 그날도 평소처럼 하루 중 속상했던 일을 '다 놓아 버리고 싶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는데,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조회수가 폭발하게 된다.
영상은 주민이의 손을 떠나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네티즌 수사대의 추리로 이내 엄마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유명 인플루언서 딸’ ‘극단적 선택 암시 후 연락 두절’이라는 키워드가 SNS를 지배한다.
엄마의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며 왜 하필 나로 태어났는지 고민하던 주민이는 마음속에서 분명한 답을 찾는다. 부모님이 바라는 내 모습에 맞출 수 없는 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주민이에게 이야기를 꺼내며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고 침착한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민이는 엄마가 나의 진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듯이 나 역시 엄마에 대해 그런지도 모른다고 인정하며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복합적인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배워 간다.
<하트의 탄생>은 온라인과 현실의 차이가 빚어내는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인스타그램 속 엄마가 실제 현실의 엄마와 완전히 같지 않듯, 유튜버 블루하트는 현실의 진짜 주민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니다. 블루하트도 주민이고, 엄마 딸도 주민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주민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 뼘 성장한다.
짧은 84쪽 짜리 소설이 유독 울림이 크다. 주민이가 자살소동을 겪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웃기면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의 사생활에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섬뜩 놀란다. '저 여자는 어디에 살까?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이렇게 계절마다 해외여행을 다니고, 이 많은 명품을 사 모으는 걸까? 부모가 누구길래, 남편 직업이 뭐길래, 돈이 얼마나 많길래 매일 이렇게 놀고 먹고 마시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걸까?' 이런 생각 누구나 해 봤을 것이다.
주민이는 인플루언서의 이면에 자리한 현실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SNS가 요즘 또래 문화의 장이고 새로운 놀이터다. 요즘의 SNS는 활발한 소통, 공유의 창이라기보다는 그냥 잡지를 넘겨보듯이 타인의 일상을 가장한 광고를 소비하는 것 같다. 인플루언서는 나와 괴리된 직업군이 아닌 친근한 이웃 같은 존재로 여긴다. 무엇이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라 공구 딜이 좋아보여서, 남들 다 쓰니까, 마지막 최저가라고 하니까 주문 버튼을 누르고 만다. 이제 2025년을 사는 우리의 삶에서 한 요소가 된듯하다.
싫든 좋든 이런 환경은 어느새 당연해졌다. 누구나 쉽게 인스타그램, 유튜브 계정만 만들면 창작자가 된다. 물론 여기서 단순 창작자가 파워 인플루언서로 거듭나기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긴 하다.
<하트의 탄생>은 사춘기와 SNS환경을 절묘하게 결합한 이시대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열다섯 살이 떠올랐다. 스스로가 한 알갱이의 우주 먼지 입자인 것 같은데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도 같았던 그 시절. 내가 누구인지, 나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