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몸이 무겁고 짜증이 나는 날이 있다. 퇴근길, 바글바글한 지옥철이 두려워 택시를 잡아탔다. 피곤한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호화였다. 택시 뒷자리에 몸을 욱여넣자마자 “날씨가 화창하네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손님.”하고 기사님이 맞아주셨다. “안녕하세요. 기사님도 오늘 힘드셨지요?” 하고 인사했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우리는 목적지까지 20분동안 쉬지 않고 말을 섞었다. 낮에 만난 진상상사 이야기부터 소소한 연애상담까지. 분명 나는 입도 달싹할 기운도 없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택시 안에서는 기운이 났다. 난생 처음 본 택시기사를 붙잡고 마음속 울분을 토하고 나니 이상하게 무겁던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오늘도 수고하셨다”는 한마디가 내 마음을 툭 찌르는 순간 꾹꾹 눌러 담아 위태롭게 출렁거리던 마음의 표면장력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성토에 가까웠는데, 그날 기사님이 한 말은 중간중간 넣은 추임새가 전부였다.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만 있어도 하루 스트레스는 말끔하게 씻겨진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가 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사진)에는 세 명의 도둑이 등장한다. 우연히 폐허가 되어버린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빈집이 분명한데 누군가가 우유 배달통에 편지 한 통을 놓고 간다. 편지의 내용은 한 여인의 고민상담이었다. 세 남자는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의심하지만, 사연을 무시할 수 없어 이내 답장을 쓰고 만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나미야 잡화점을 둘러싼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뚜렷한 계획 없이 그날그날 적당히 살아가던 세 젊은이에게 일어난 하룻밤 동안의 일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기묘하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좀도둑이어도 그들이 건네는 해법은 명쾌했다. 지금껏 한번도 다른 사람의 고민 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방법은 좀 서툴렀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편지를 썼다. ‘공부하지 않고도 시험에서 백 점을 맞고 싶다.’는 아이의 고민에 그들은 전문적인 상담 대신 가장 자신 있는 ‘돌직구 화법’으로 대화를 이끈다.
남의 고민을 듣고 해법을 제시하는 일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보통 상담 관련분야 학위 두어개, 경력 수십 년쯤은 돼야 남의 인생에 참견할 자격 요건을 갖췄다고 여긴다. 그런데 여기 젊은이들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경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결점투성이다.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던 젊은이들이 30년전, 과거에서 날아온 편지를 통해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은 한 편의 성장드라마다.
가만히 보면 도둑들이 한 일이라고는 답장 몇 줄 해준 것이 전부이다. 신박한 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큰 위로가 됐고 힘을 얻었다”고 고마워한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한 순간 그들의 고민은 이미 해결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도둑들도 희망을 찾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 밤 처음으로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했다고 실감한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나 같은 바보’가 이런 일을 해냈다고 되뇐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가까운 친구나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책 속 사연들은 하나같이 한번 본 적도, 만난 적도, 심지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어쩌면 미지의 인물이기에 더욱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이라는 것이 그렇다. 나와는 먼 사람일수록 고백이 솔직해진다. 나미야 잡화점으로 고민을 상담해온 사람들, 그리고 어쩌다 상담하게 된 삼인조 도둑들 모두 남이기에 허심탄회할 수 있었다.
나라면 어떤 상담 편지를 적을까. 주저리 주저리 적어 내려간 편지를 누군가 읽어준다고 믿고 나니 괜히 답장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 할아버지와 세 남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