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 아이가 뇌성마비 장애로 몸의 어느 부분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떨까? 매일 극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그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
태어날 때 뇌에 손상을 입어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눈동자 하나 마음대로 못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 소년 숀 맥다니엘이 있다. 공식적인 아이큐는 1.2에 불과하다. 음식을 받아 넘기기도 힘들다. 하루에 몇 번씩 발작을 일으킨다. 세탁기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들썩거리며 쾅쾅쾅 소리를 내는 것처럼. 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5살 이후에 본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는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 어렸을 때 숀은 누나와 ‘선생님 놀이’를 하면서 책 읽기를 배웠다. 텔레비전, 라디오, 가족들의 대화가 그의 선생님이다. 물론 그 놀이들은 모두 누나가 일방적으로 떠들고, 숀은 반응 없이 가만히 듣는 방식이었다. 숀이 14살이 됐을 때, 아빠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비극적인 것은 아빠가 그런 계획을 세운 이유가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사진)는 뇌성마비 장애우 숀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비참하도록 암울한 상황이어도 숀은 14살 특유의 재기 발랄한 매력을 발하면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을 고백한다. “쓸모 없는 몸뚱이 안에 갇혀 있는 게 어떤 느낌이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좌절감을 느껴 본 적이 있냐고? 지금 누구 놀려!”
숀이 늘어진 팔다리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맛보는 순간이 하루 몇 번의 발작이다. 발작이 일어날 때면 숀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그의 몸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타닥 타닥, 타닥 발작이 일어나면 숀은 육체를 벗어나 하늘을 날거나 솟구쳐 오르거나 시공을 가로질러 누비고 다닌다. 가족들은 악마의 손에 놀아 나는 듯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고통스러워하지만 숀의 머릿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찬란하고 역동적인 14세 소년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 누나의 친구 앨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에게는 발작이 기쁨이고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이야기 속에는 두 아빠가 등장한다. 한 명은 아이의 고통스러운 발작을 보다 못해 아들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씌운다. 이후 아버지는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간다. 나머지 한 명이 숀의 아버지다. 아들의 이야기로 시를 써 퓰리처상을 받고 유명해지지만 아이의 고통을 볼 수 없어 그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집을 나가버린다. 숀의 아빠는 가정을 포기할 만큼 아들의 고통이 힘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숀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숀의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가 끝내줘야 하지 않나 고민을 거듭한다. 아들의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설령 그 일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 할지라도. 언뜻 보면 아들을 살해하려는 무정한 아버지 같아도 자세히 보면 아들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아빠의 절절함이 읽힌다. “나는 죽기 싫어요.” 뇌성마비, 식물인간, 저능아인 나에게도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숀의 목소리에서 아들이 살아있어야 하는 그 절실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발버둥치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를 쓴 테리 트루먼 작가에게도 숀과 같은 아들이 있다. 부모와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아들을 보면서 ‘저 아이에게 인생이란 어떤 의미일까’를 물었다. 이 소설 속의 숀처럼 작가의 아들 역시 숨겨진 천재일지, 감자칩과 로큰롤을 사랑하는 재치꾸러기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들의 정신세계는 의사조차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뇌성마비 장애우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아빠가 무슨 권리로 아들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사랑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과연 그 책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생각해본다. 죽음으로써 아이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까지도 부모의 책임에 포함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