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한 수 배운 카일루아 비치
엄마도 한 수 배운 카일루아 비치 (Kailua Beach Park)
토요일 오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일본인 아줌마와 남자아이를 만났다. 비치에서 막 돌아왔는지 아줌마 얼굴이 발갛게 익었고, 화장도 거의 지워져서 주근깨가 종종종 보였다. 전형적인 일본인 얼굴에 가느다란 팔, 다리, 뽀얀 피부가 참 인상적이었다. 우와... 아줌마가 예뻐도 너무 예쁘다. 같은 아이 엄마로서 정말 부러웠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물놀이 후 피곤함이 비쳤다. 엄마의 양 손에는 물놀이를 위한 짐이 가득했고 아이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잠깐 사이에도 징하게 칭얼거렸다. 보고 있는 나도 짜증이 날 것 같은데 이 엄마는 얼굴 하나 안 찡그리고 아름답게 훈육을 하는 것이다. 나긋나긋한 말투가 마치 일드(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완전 비현실적인 육아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그 상황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그때서야 부끄러운 듯 웃음을 보인다. 나 역시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니?’라는 느낌의 미소를 보냈다. 곧이어 어색한 대화가 이어졌다.
“Are you coming from beach?"
"Yes, we came from Kailua Beach. Do you know?"
"Yes, but I haven’t been there. How was there?"
“Great! The best beach for kids in honolulu, I think. You should take your kids there"
"Alright, thanks."
잠깐의 대화로 카일루아 비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주변에 비치가 많기 때문에 차로 1시간씩이나 운전해서 또 다른 비치에 갈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the best beach for kids라는 일본 아줌마의 말을 들으니 이젠 동네 비치를 벗어나서 좀 멀리 뛰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루아 비치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글맵에서 카일루아 비치에 도착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여기저기 공사장들이 보였다. 설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이 됐다. 아름다운 비치 옆에 공사판이라... 흠, 어째 어울리지 않았다.
“어...! 어....! 우와! 대박!”
이 소리는 천안 아줌마가 카일루아 비치를 처음 본 순간 냈던 소리다. 그 순간 솔직히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사람이 멍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드는 생각은 ‘왜 여길 이제 왔지?’였다. 한 시간 운전이 아깝지 않았다. 와이키키에 있는 비치들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여기는 느낌이 달랐다. 현실 세계가 아닌 듯 몽환적이었다. 에메랄드 빛깔의 물이며 수평선에 깔린 나지막한 구름들이 오묘하고 평화로웠다. 화려한 관광객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동네 사람들이 소박하게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사진 몇 장을 겨우 찍고는 바로 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마실 나온 커다란 개들을 구경했다. 개팔자 중에 상팔자라고 생각했다. 어느 비치에 가나 나에겐 모래의 퀄리티도 아주 중요했는데 단연코 최고 등급의 모래였다. 아, 어떻게 한 삽 퍼서 한국에 가져갈 수 없나? 너무 곱고 따뜻해서 모래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누워있고 싶었다. 내 얼굴의 철판이 지금만 같이 두꺼웠어도 주저하지 않고 시도했겠으나 그때는 나름 부끄러움도 탔다. 다음번에는 분명히 뜨끈뜨끈 모래찜질을 하고 누워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바다에 들어가더니 처음엔 바닷물에 물감이라도 풀어놨다고 생각했는지 손으로 퍼서 담아 본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둘이 연신 손으로 무언가를 잡는 것 같더니 옆에 있는 아이들까지 모아서 물고기를 몰아본다. 세상에나 하와이 생활 한 달 만에 수렵생활이 가능해지다니 놀랍지 않은가.
생판 처음 보는 아이들과의 대화가 궁금했다. “You, this way.”, “okay, good”, “it’s my turn.” “no, no!” 오우, 이런 토막말로 대화가 되다니 놀랍다. 이렇게 진귀한 광경을 혼자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핸드폰을 들고 바다로 들어갔다. 살금살금 아이들도 모르게, 물고기도 모르게 다가갔다. 아이들 집중해서 노는 모습이며 멋진 카일루아의 물빛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좋은 곳에 오면 항상 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자기가 잡은 물고기를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아빠! 이거 보여? 내가 다섯 마리 잡고 저기 있는 애가 세 마리 잡은 거야. 여기 물고기 엄청 많아!” 화면에 나타난 남편은 카일루아 비치의 물 색깔보다는 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의 얼굴 색깔에 감탄했다. “얼굴이 이제 완전히 하와이 원주민 다 됐네?” 남편은 아이들의 새까만 얼굴을 보며 연신 깔깔 웃었다. 그런 아빠에게 아이들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줬다.
물고기 모으느라 아빠랑 통화도 안 하던 노란메리야쓰는 갑자기 “아빠! 여기 봐봐! 엄청 예쁜 물고기가 있어! 내가 보여줄게”하며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뿔싸. 그렇지, 하루도 조용하게 지나가면 큰일이 나지. 그 순간 내 손도 미끌, 그분의 손도 미끌하며 핸드폰은 바로 바다에 풍덩 입수를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은 모두를 얼음으로 만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노란메리야쓰 본인도 얼굴이 굳어졌다. 주변에서 놀고 있던 아저씨들도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순간 '뭐가 지난 간 거지?'하며 당황했고 재빨리 주워야 하는데 파도가 철썩 한번 내리쳤다. 아저씨들은 내 핸드폰을 잡아서 건네줬다.
교육이라는 것이 아이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날이었다. 보통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내가 버럭 안 했을 리가 없다. 어린아이의 생활이라는 것이 그 자체가 실수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 나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진짜 ‘뚜껑 열리는 날’이었을 것이다. 노란메리야쓰도 엄마 성격을 알고 있으니 엄청 놀란 듯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순간 우리를 이곳에 보내 준 일본 아줌마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화내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줬던 그 모습을 내가 봤듯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았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나 자신이 대견했다. 갑자기 통화가 끊긴 남편에게 연락할 길이 없으니 불안했지만 아이들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건 일본 아줌마 코스프레인가, 뚜껑이 확 열리는 순간이 얼렁뚱땅 지나가니 그다음은 훨씬 더 수월했다. 어차피 핸드폰은 물에 빠졌는데 아이한테 화를 낸들 뭐가 달라지나 싶었다. 역시 사람들은 나를 쳐다봤다. 내가 일본 아줌마를 봤듯이 존경의 눈빛(?)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사람의 마음도 온유하게 만드는 카일루아 비치였다. 노란 메리야스는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무 일이 없으니 도리어 알아서 셀프 반성 모드에 돌입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는 엄마의 핸드폰이 안 켜져서 아빠와 통화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다. 또 핸드폰이 비싸다고 하는데 (엄마가 돈을 아껴야 하는데) 자기 때문에 엄마가 큰돈을 쓸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급기야는 돈이 많이 들면 자기 통장에서 1만 또는 2만 원 정도는 빼서 써도 된다나 뭐라나... 그 이야기까지 들으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켜줄 필요성을 느꼈다. 화를 내지 않은 나의 모습에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여겼는데 아이는 계속 집에 가면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모양이다. 그때부터는 내가 더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았기에 아이가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못 두나 많이 미안했다.
“엄마는 괜찮아. 아빠랑은 집에 가자마자 노트북으로 통화하면 되고 핸드폰은 내일까지 말려보고 안 켜지면 여기서 싼 걸로 하나 사면되니깐 걱정하지 마.”
노란메리야쓰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는지 곧바로 골아떨어졌다. 다시 한 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그때 그녀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맘에 드는 얼굴이었다. 노란메리야쓰는 다시 신나요모드로 돌아가 있었고 누구도 힘들다고 칭얼거리지 않았다. 엄마가 조금 자라니 아이들은 훌쩍 더 자란 것 같았다.
와이키키 비치 근처에는 모든 편의시설이 모여 있다면 카일루아 비치 근처에는 그 흔한 ABC마트도 없었어요. 우리가 목격했던 공사장의 대부분은 카일루아 비치에 들어온 중국의 자본이라는데 대부분이 숙소와 편의시설이라고 했으니 현재는 그때보다 관광객들로 많아졌을 것 같습니다. 관광객이 많이 와도 아름다운 카일루아는 비치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카일루아 비치 가는 길에 있는 Boots and Kimos는 하얀 마카다미아 넛츠 소스를 뿌린 팬케이크로 유명합니다. 보통 한 시간씩 기다려서 먹는데 to go (포장)할 경우에는 금방 준비가 되더라고요. 물론 식당 안에서 먹는 것이 좋긴 하겠지만 아이들과 기다리는 것이 힘들 때는 포장해서 카일루아 비치에 와서 먹는 것도 나름 운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