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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은 Jun 14. 2017

월드컵은 죽 쒀도 한국 축구의 위상을 알리다. ⑱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기 

월드컵은 죽 쒀도 한국 축구의 위상을 알리다


한국에선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준비 기간 동안에 땅을 보러 다녔다는 소식으로 시끄러웠다. 늘 그렇지만 일이 잘 풀렸다면 땅을 보러 다녔든 놀러 다녔든 다 묻혔을 것 같은데 그러기엔 2014년도 월드컵 성적이 너무 빈약했던 것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우리도 새벽을 기다리며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축구 응원에 열을 올렸겠지만 하와이는 월드컵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조용했다. 다들 자기 집 소파에서만 축구를 보는 분위기인지 거리는 그저 썰렁했다. 그렇게 우리는 축구를 잊을 뻔했다.



두 번째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별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은 터라 이 느낌은 마치 개학식 전 날 방학숙제가 있긴 있는데 뭔지 알고 싶지 않은, 그래서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상태와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나를 그대로 버리시지 않으셨다. 금요일 아침 아이들을 학원에 내려주고 나오는 길에 같은 반 친구 션(Sean)의 엄마와 마주쳤다. 


“Jonathan(신토불이사나이) 축구 좋아하나요? 오늘 오후에 션은 축구 클럽에 가는데 같이 가도 돼요.”

“아! 좋아요!” 



아, 이게 웬 떡인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덥석 잡았다. 오예~ 막막했던 금요일 오후에 스케줄이 잡혔다. 아이들도 신이 났지만 사실 내가 더 신이 났다. 이렇게 나의 사랑하는 ‘하와이 숙주님’은 내가 무언가 필요할 때 혜성처럼 등장하셨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사람이 나의 은인이 되어 준다. 그래서 나 역시 누군가의 숨겨진 은인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오지랖이라고 불러준다. 우린 그렇게 오지랖으로 일맥상통하는 시스터였던 것이다.   



와이키키 보다 더 그리운 곳 



그녀의 선한 오지랖 덕분에 우린 진주만(Pear Harbour)에 왔다. 션 가족은 우리처럼 하와이 여행자도 아니고 와이키키에 사는 외국인도 아니다. 아빠가 미 해군에서 근무하셔서 진주만에서 살고 있고 그 시기에 다행히(?) 아빠는 일본에 계셨다. 아빠와 장기간 떨어져 있는 것이 이 가족에게는 힘든 일일 수 있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동병상련의 최고 파트너를 만난 것이다. 하와이 1등 오지랖 션 맘과 오지랖 레벨 “신”인 내가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션의 축구 클럽은 미군 캠프 안에서 진행되는 군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축구를 가르치는 코치며 감독이며 모두 군인들의 자원봉사로 진행되었다. 따로 수업료를 내는 수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차라리 돈 내고 들어가는 축구 클럽이라면 당당하게 수업료 내고 참가하겠는데 군인 자녀도 아닌데 친구 따라갔다가 너는 왜 왔냐며 내쫓으면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 자녀가 아닌데 그냥 가도 될까요?” 


예상치 못했던 불금의 스케줄에 들떴던 내가 급소심해져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나의 하와이 숙주님은 의연하게 말씀하셨다.


“미국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요. 아이가 왔는데 설마 너는 구경만 하라고 하겠어요? 같이 하자고 할 거예요. 일단 같이 가요.” 




그녀는 이렇게 약간의 무데뽀 정신과 군인 아내다운 추진력을 겸비했다. 일사 후퇴 때 헤어진 나의 동생이었던가. 나와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션 맘의 차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션과 신토불이 사나이는 넓은 잔디밭으로 빨려 들어갔고  나의 하와이 숙주님은 사뿐사뿐 코치에게 다가가서는 쿨하게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제대로 적중했다. 


“I brought Sean's friend today. He is from Korea.” 

“Oh! ye... Come and play!” 






그녀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미국이라고 뭐 다르지 않구나. 하긴 나라도 외국에서 친구가 놀러 왔다고 하면 끼워줬을 것 같다. 션 맘이 귀띔해 준 대로 살짝 준비해 간 축구화, 축구양말, 씬가드를 주섬주섬 챙겨 입히기 시작했다. 신토불이사나이는 신이 났다. 노란메리야쓰도 덩달아 신이 났다. 친구가 있고 공이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아이들을 넓은 풀밭에 내려주면 정말이지 강아지랑 똑같다. 어디서 저런 힘이 샘솟는지 그냥 뛴다. 뛰는 너희들을 볼 때마다 경이롭고 부럽다. 






면세점에서 우여곡절 끝에 선물로 받은 브라질 월드컵 공식 볼은 꺼내는 순간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월드컵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아 보였던 하와이 사람들도 월드컵을 공식 공에 환호하는 것을 보니 왠지 우리의 하와이 여정을 처음부터 누군가 이끌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망상일까?  



와이키키에서 놀 때는 사방에 모두 한, 중, 일, 아시아 삼국지였는데 미군 부대 안으로 들어오니 진짜 외국에 온 느낌이 들었다. 진정 내가 바라던 분위기였다.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피부로 느끼기를 바랐다. 물론 지구 상에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백인을 보고 미리 위축된다거나 흑인을 하대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줌마들도 여러 국적의 아줌마들이 모이면 정말 다 똑같다. 그러니 아이들도 여러 나라 아이들과 마구 섞여서 놀아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놀다 보면 인종과 상관없이 자신의 성향이 맞는 아이들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한 나라를 단일 민족이 이렇게 오랜 세월을 지켜왔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다. 게다가 숱하게 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위대한 역사 때문에 우리는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것에 인색했고 지금도 배타적이다. 예전에 친한 선생님의 병환으로 초등학생 전문 영어학원에서 대타를 뛴 적이 있는데 이때 co-teaching 파트너로 나이지리안 아메리칸 선생님이 영국에서 건너왔다. 무려 런던대학교 졸업생이었다. 피부색은 완전히 흙갈색의 아프리칸이지만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아메리칸이었다. 게다가 나이지리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영국식 영어 발음과 미국 공교육에서 배운 미국식 발음을 모두 구사했다. 솔직히 동네 골목길 영어학원에 오기에는 과분한 스펙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항하지 못했다. 그의 뽀글거리는 까만 머리를 아이들은 더럽다고 했고 학부모들은 그의 눈동자 굴리는 모양이 불순해 보인다며 원장한테 계속 컴플레인 전화를 했다. 때마침 미국인 영어강사가 9세 여자아이를 성추행했다는 사건이 전국을 강타했고 온 신문을 도배했다. 아무 상관없었던 그는 힘들게 버티다가 결국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참 좋았다. 배울 점이 너무 많았다. 효자였고 놀랍도록 박학다식했다. 그렇게 굴러온 복을 차 버렸다. 그가 떠나고 나는 키가 엄청 크고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뉴질랜더 영어강사와 함께 일을 했는데 뉴질랜드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영어 발음은 나조차도 몇 번씩 물어봐야 할 정도로 심하게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계약기간을 다 채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적이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진국을 알아보는 혜안을 키워야 한다.    





신나게 공을 몰고 뛰어가던 신토불이 사나이가 갑자기 돌아온다. 그 소중한 월드컵 공도 내팽개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걸어오고 있다. 나는 돌아오는 아이를 심란하게 바라봤다. 겉에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뭔가 심사기 뒤틀린 얼굴이었다.

         


“엄마, 나 하기 싫어.”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왜?”

“저기 있는 애가 나더러 Korean이래.”



축구 클럽 코치의 come and play라는 말에 냉큼 들어갔지만 축구 클럽의 아이들은 뉴 페이스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자기들끼리는 폐쇄적인 클럽일 수도 있으니깐 이해하기로 했다. 그런데 신토불이 사나이한테 설명할 길이 막막했다. 솔직히 그 아이가 어떤 의도로 Korean”이라고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Korean boy가 왔으니 “Korean”이라고 했을 수도 있고, 신토불이사나이의 느낌처럼 Korean이 여길 왜 왔느냐는 의미로 말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아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뒤로 물러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나의 평정심을 꽉 붙잡고 말했다.    

  

너 Korean 아니야? Korean 보고 Korean이라는데 뭐가 문제야.
여기선 다른 거 필요 없어. 축구로 보여줘.






11월생인 신토불이 사나이는 한국에서는 키가 큰 편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미국 애들이 사이에선 키가 큰 편이었다. 게다가 학교 운동장을 마당처럼 쓰는 우리 아이들은 세계 어딜 갖다 놔도 공차는 것은 빠지지 않으니 신토불이사나이의 공 놀림에 세 명의 코치가 부라보를 연발했다. 그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 축구를 보더니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수영장에서 신토불이 사나이의 수영을 본 아빠와 비슷한 질문을 했다. 역시 축구 코치답게 유소년 축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아이들은 축구를 몇 살부터 하느냐?”

“이렇게 하려면 얼마나 배워야 하느냐?”

“이 정도 잘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으냐?”

(세상에나 내가 축구하는 애들이 몇 명인지 어떻게 아냐.)






코치님은 월드컵 알제리 전의 손흥민을 기억했다. 그 해 Korea가 16강에도 못 올라간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오직 손흥민의 플레이가 인상적이었고 그를 차세대 유망주로 점쳤다. 그리고 바로 Korea에서 날아온 신토불이사나이의 축구를 보자 손흥민과 신토불이사나이가 오버랩 됐던 것이다. 진정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겉으로는 겸손한 척 웃었지만 이미 하늘 끝까지 승천한 어깨를 움추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두고 봐라. 손흥민 같은 애들이 우리 동네에 천지삐깔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여태껏 월드컵 순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던 코치가 웃으면 이런다. 


“그런데 이번에 월드컵은 왜 그 모양이냐...” 


이런... 여태 월드컵에 대해서 모른 척하더니 다 보고 있었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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