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교육에 대한 짧은 생각
하와이까지 와서 영어 공부해야 할까?
하와이에서 한 달을 있으면서 아이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내가 아이들의 모든 공백을 채워줄 생각을 하니 그건 너무 숨 막히는 일이었다. 나의 생활이 완벽할 수 없듯이 아이의 생활도 완벽할 수는 없다. 하와이에 왔다고 해서 어떻게 매 순간 신나는 일만 있을 수 있겠나. 때론 실망할 수도 있고 심심할 수도 있다. 나는 꼼꼼하게 짜인 일정을 소화해 내는 엄마가 되기보다는 아이를 심심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계획을 짜게 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매일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규칙적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신토불이 사나이는 파닉스를 배우며 기초 수준의 리딩이 가능한 상태였고 노란 메리야스는 알파벳을 익히고 파닉스를 막 배우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아이를 한 달 동안 영어 학원에 보내면서 대단한 성과를 기대한다면 그건 아동학대 수준의 가혹함이다. 생각해 보면 한 달이라는 시간은 엄청 짧은 시간이다. 아이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를 사귀고 어울릴 수는 없을뿐더러 엄청난 사교성으로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한 달이라는 시간은 좀 놀만하면 돌아와야 하는 아쉬운 시간이다. 그렇게 짧고도 귀한 시간을 한국에서 하던 대로 영어 학습의 연장선으로 활용하려고 한다면 그 엄마는 하와이 아니라 어디에도 가면 안 된다.
내가 어쩌다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엄마들의 조급증에 속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새로 생긴 학원에서 파닉스를 3개월에 끝내준다”, “겨울방학 때 영문법을 마스터시킨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영어를 끝내 놔야 중고등학교 때 다른 과목을 잡는다”는 둥 영어를 무슨 후딱 끝낼 수 있는 과목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후딱 끝내고 나면 아이의 영어 실력은 그 상태로 킵 시켜 놓을 수 있는 밸런타인 30년 산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대입을 앞두고는 영어를 대하는 자세가 한 번 더 바뀌는데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면서 너는 왜 CNN은 안 보니, TED를 들어라, 내가 학원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 너는 왜 말 한마디도 못하냐며 아이의 기를 죽인다.
나처럼 가방끈 짧은 강사가 영어교육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 봤자 썰을 푸는 수준이 되기 때문에 나는 종종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이병만 교수님의『당신의 영어는 왜 실패하는가』를 소개한다. 이병만 교수님은 한국인에게 영어라는 언어가 그렇게 절실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신다. 이렇게 절실하지 않은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기 위해서 어린 시절부터 아이가 영어 학원으로 보내지는 것은 그저 외국어를 배우는 시간을 늘리는 것일 뿐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꼭 잘하고 싶다면 시작하는 나이와 상관없이 쉼 없이 지난하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교수의 의견이다. 전적으로 공감하고 박수를 쳐 드리고 싶다. 아이에게 영어를 잘 하고 싶어 하는 욕심은 줄넘기를 잘 하거나 노래를 잘 하고 싶다는 마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한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든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든가 심지어 엄마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영어를 해야 한다는 식의 동기부여는 효과도 없으며 약발도 길지 않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되었다면 그냥 꾸준히 접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그냥 평생 하는 거다. 그러니 어디 가서 “파닉스 몇 개월에 끝내느냐”, “영문법 몇 달이면 꿰차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언급된 그 “몇 개월”은 그저 교재를 한 권 끝내는 물리적인 시간일 뿐이지 끝이 어디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 영어 교육은 서두를 필요도 없으며 후딱 해치울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한 미국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와이에서 학교생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영어 실력이 실전에 투입되었을 경우에 짧은 시간에 적응이 가능할 정도이거나 아이의 기질이 외국 학교에서 여러 나라의 아이들과 어울려 보고 싶은 욕심이 있는 아이라면 하와이만큼 좋은 환경도 없다. 여러 민족의 아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베테랑들이다.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을 숱하게 봐 왔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이를 빨리 적응시킬 수 있을지 잘 알고 있다. 요즘엔 한국, 중국, 일본 아이들이 하와이 어디서나 메이저가 될 정도로 많은 한국 아이들이 하와이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모교인 푸나후(Punahou),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 이름을 딴 이올라니(Iolani), 미드 퍼시픽 인스티튜드(Mid Pacific Institute)등은 하와이에서 유명한 학교들로 미리 준비해서 간다면 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신토불이 사나이와 노란 메리야스는 S. King’s St에 있는 작은 학원을 다녔다. 영어도 잘 안 되는 상황에서 큰 학교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달랑 한 달이라는 시간뿐인데 그 시간을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면서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같이 공 찰 수 있는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명이 한 교실에서 북적거리는 학교보다는 비슷한 수준의 영어를 함께 더듬거릴 수 있는 소수인원의 학원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원에 처음 상담을 하러 갔을 때, 작은 교실에서 네다섯 명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동그랗게 앉아서 플래시 카드를 넘기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January, February, March..로 시작하는 것이 영어로 월(month) 이름을 배우는 중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아이들은 까르르 뒤로 넘어간다. 옷도 헤어스타일도 비슷한 일본인 쌍둥이 여자 아이들은 춤을 추며 선생님을 끌어안는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나도 가르치는 사람인지라 하와이에서는 말 안 듣는 어린양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나 궁금했었다. 잘 보고 우리나라 선생님들하고 비교도 하고 잘난 척도 좀 하고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파워풀한 웃음소리에 넋이 나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갔었는지도 하얗게 잊어버렸다. 그저 우리 아이가 빨리 저 반에 들어가서 저렇게 웃겨서 데굴데굴 구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언제나 첫날은 떨린다. 아이가 처음 어린이집에 간 날, 유치원에 처음 간 날, 학교에 처음 간 날은 엄마도 마음은 그곳에 있다. 무슨 일을 해도 왠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고 전화벨이 울리는 것만 같다. 혹시 쉬를 실수하지는 않았을까, 친구랑 놀다가 싸우지는 않았을까, 다치지는 않았을까, 선생님한테 혼나지는 않았을까, 아이가 돌아와 내 앞에 섰을 때 허겁지겁 아이를 한 번 꽉 끌어안고 그제야 안도의 한 숨을 쉰다. 그리고 바로 아이에게 “재미있었어?”, “선생님 좋아?”, “친구는 사귀었어?”등등 폭풍 질문을 퍼붓는다.
신토불이 사나이에게는 하와이 영어학원이 태어나서 처음 가는 학원이었다. 그 어떤 학원도 가 본 적이 없으셨다. 이 분의 성격이 워낙 조용하시고 한국말도 필요한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 나는 이 분을 내놓으면 항상 불안했다. 걷어 차이고도 아무 말 못 할까 봐 노심초사였다. 그러니 아이를 영어학원에 넣어주고 나오는데 내 뒤통수가 묵직한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집에 돌아와서 커피 한잔 하며 좀 쉴 수도 있겠건만 자꾸만 이 분이 외국인 선생님 앞에서 눈만 껌뻑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날 아침 8시 15분부터 12시 15분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아이를 데리러 학원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학원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처음 어린이집에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비장하게 학원 문을 열고는 소심하게 빼꼼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침 8시 15분부터 1초 전까지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았는데 아들은 이미 학원을 접수했다. 또래 남자아이들로 삼총사가 만들어졌다. 첫날인데 너무나 소란했다. 마치 하와이에서 같이 지냈던 아이들처럼 쿨하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See you tomorrow.”
[작은 학원이다 보니 한국에서 오는 학생들보다는 현지 아이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보충 수업을 하러 온다.]
엄마들은 관 뚜껑 닫을 때까지 자기 아들을 잘 모른다. 나는 그때 그 상황을 내 목전에 두고도 순둥이 내 아들은 말이 없다는 둥 그래서 할 말도 잘 못한다는 둥,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둥, 남들한테 치일까 봐 걱정이라 둥 그딴 헛소리를 한다. 나중에 며느리가 이 글을 보면 우리 어머님 저 때부터 착각 증상이 위중했다며 흉을 보겠지만 그 순간은 착각하게 해 줘서 고마웠다. 결국 친구 만나러 학원에 가신 신토불이 사나이는 본인의 엄청난 친구와 향후 우리의 하와이를 화려하게 만들어 주신 일명 나의 “하와이 숙주”를 모셔왔다. 장하다 아들아.
영어라는 게 알면 참 할 일이 많아지는 좋은 언어다. 그게 내 나라 말이 아니라서 좀 짜증 나긴 하지만 약간만 익혀 두면 놀거리, 놀 사람이 많아진다. 그걸 아이들이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 한국에 엄마들도 아이들 캠프를 보내기 위해서 유학원에 돈 보내고 다 알아서 해 주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좀 여기저기 뒤져보고 물어보면 더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영어에 움츠리지 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길 부채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