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씨, 보고 싶어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박 약사님”, 나의 어머니시다. 청춘을 조그만 골목 약국에 쏟아 부으시고 환갑이 훌쩍 넘으신 지금도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일을 놓지 않으시는 맹자, 공자, 다음으로 현명하신 분이다. 내가 엄마의 발뒤꿈치 때만큼이나 따라갈 수 있을까? 나도 진심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훌륭한 엄마는 어떤 엄마일까, 아이를 잘 키워낸 엄마가 훌륭한 엄마일까? ‘훌륭한 엄마 = 실적 좋은 엄마’로 여겨지는 시절을 살고는 있지만 나도 울 엄마처럼 새끼들한테 만은 인정받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여러 엄마를 만나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하와이에서는 션 엄마, 미선씨를 만났다.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나의 짱가, 미선씨가 아들의 생일을 앞두고 한국에서 온 신토불이 사나이를 초대했다. 참으로 고마운 미선씨다. 그녀 역시 나처럼 남편과 멀리 떨어져 홀로 1인 다역을 소화해 내며 훌륭한 엄마의 반열을 향해 뛰고 있었다. 아들의 생일 몇 주 전부터 이것저것 예약을 시작했고 장소를 정하고 친구들을 초대했다. 엄청 바쁜 듯 보였으나 전문가처럼 느긋해 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미국 아이들 생일파티라는 것을 영화에서나 구경해 본 나로서는 돕고 싶어도 뭐가 뭔지 몰라서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줘요."
"음식 하고 매지션(magician) 팀은 예약했고요. 장소도 예약했고요, 파티 데코레이션도 이미 다 사놨어요."
그녀의 이 말을 나는 '도울 일 없다'는 것으로 접수했다. 그래서 생일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서 슬슬 움직였다. 이런 초대를 받은 경우 너무 일찍 가도 실례, 너무 늦게 가도 실례라고 생각하고는 살짝만 일찍 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계획적으로 30분 전에 도착했다. 파티 장소로 예약한 커뮤니티 센터는 어쩐 일로 너무 조용했다. 파티 준비가 얼추 끝났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왔는데 빈 방에 덩그러니 접이식 테이블만 쌓여 있었다. '뭐지? 여기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짱가가 나타났다. 활짝 웃으며 “와~ 구세주 오셨네요. 기다렸어요.”라고 한다. 어잉? 예상외의 반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나는 바쁘게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아무리 짱가라도 혼자서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파티를 장식할 물품들을 나에게 넘겨주고는 알아서 해 보라며 다른 일을 처리하러 종종종 사라졌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임? 이런 것도 해 본 사람이나 하지 나는 이런 미적 감각이 없단 말이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고마웠다. “구세주 오셨네요. 기다렸어요.” 이 말이 나를 얼마나 신나게 했는지 짱가는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번번이 그녀의 도움을 받았지만 나는 해 줄 게 없어서 항상 미안했다. 그런데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사람이 쓸모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가. 나는 빨리 움직였다. 시간이 없었다. 역시 대단한 짱가다.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생파의 백미인 데코레이션도 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설마 "이미 다 사놨어요."라는 말이 "사놨으니 일찍 와서 좀 도와줘요."였을까?
스피커로 경쾌한 음악이 빵빵 터져 나오고 날씨는 또 왜 이리 좋은지(하와이 날씨는 정말이지 신이 주신 축복이다) 이제야 파티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속속 도착하고, 천정, 벽, 테이블 장식을 마친 나는 이제 음식 세팅을 돕느라 분주해졌다. 짱가는 초대한 친구들과 그 가족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신토불이 사나이와 노란 메리야쓰는 갑자기 많아진 외국 아이들에게 적응이 안 되는 듯, 분위기 파악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밖에서 대기 중이던 커다란 에어 바운서에 공기 주입이 시작되고 모든 아이들은 방방 뛰고 싶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미국 도련님의 생파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드디어 매지션(magician), 페이스페인팅, 풍선아트를 하는 삼인조가 도착했다. 50대 즈음으로 보이는 페이스 페이팅 아줌마는 아티스트로서 주관이 너무 뚜렷하셨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하고 싶은 그림이 있을 텐데 아이가 입은 옷 색깔과 얼굴을 봐 가면서 (본인 판단에) 잘 어울리는 그림으로 그려 주는 것이다. 참 대단한 직업의식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노란 반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팔뚝에 노란 반짝이 가루가 쏟아지는 꽃들을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그림은 골라도 소용없었다. 예술가의 고집이랄까?
마술사의 공연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올망졸망 모여서 엄청난 집중력들을 발휘했다.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모자 속에서 토끼가 나오고, 아이들이 마술사의 속임수를 찾으려고 애쓰니 마술사 아저씨는 일부러 실수하는 척하며 더 신기한 마술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풍선 아트를 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나는 한국에 가서 빠른 시일 안에 풍선 아트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난이도가 낮은 것들을 계속 만들어 주는데 아이들은 엄청 좋아했다. 기술자의 실력에 살짝 실망스러우면서도 나도 풍선아트 배우면 하와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일파티에 온 삼인조의 역할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풍선아트 밖에 없다는 이유도 있다. 내 실력으로 페이스페인팅을 했다가 쪽박 찰 것이 뻔하고 마술은 이제 와서 배운 들 남들 앞에 서서 저렇게 선보일 자신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제일 만만한 것이 풍선아트였다. 나는 미선씨가 이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삼인조의 주말 예약이 향후 5개월간 꽉 차 있었는데 누군가 이 날 파티를 취소하는 바람에 션의 생일파티가 성사되었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정도라고 하니 아쉬운 대로 풍선아트를 배워두면 요긴할 것 같지 않은가.
영어라고는 알파벳만 아는 신토불이 사나이와 노란 메리야쓰가 이 아이들과 잘 섞일 수 있을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행히 축구 클럽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있어서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에어 바운서에서 정줄 놓고 뛰다가 풍선 아저씨가 주신 풍선 칼과 풍선 활로 싸움 놀이를 했다. 친구 엄마들은 이렇게 준비해 준 션 엄마에게 대단하다며 고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She did everything.”이라며 나를 소개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파티 30분 전에 와서 스카치테이프로 이것저것 붙인 일 밖에 없는데 졸지에 미국 엄마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게 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칭찬은 아줌마도 춤추게 한다고 나는 “너의 딸 생일에 나를 불러다오. 내가 다 해줄게.” 라며 푼수를 떨었다.
마술사의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고 아이들이 밖에 모였다. 이번 차례는 우리에겐 생소한 피냐타 (piñata: 남미, 멕시코, 미국에서 생일에 빠지지 않는 행사로 아이들이 눈을 가리고 사탕이 가득한 종이인형을 막대기로 쳐서 터뜨린다) 차례였다. 미드에서나 봤던 피냐타인데 내 아이들이 해 보게 되다니 내가 더 신이 났다. 상어 모양의 피냐타를 나무에 걸고 아이들은 차례로 눈을 가리고 막대기를 휘둘렀다. 눈을 가려야 하기 때문에 막대기를 휘둘러도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휘둘렀다. 영리한 아이들은 막대기로 툭툭 쳐서 피냐타의 위치를 파악한 후 힘껏 패줬다. 여러 명한테 돌아가며 맞던 피냐타는 결국 퍽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그 안에서 온갖 사탕과 젤리들을 쏟아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미국 사람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피냐타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며 아이들이 먼저 물어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피냐타도 깨지면 그 안에서 사탕이 나오냐는 것이다. "저 피냐타는 엄청나게 두들겨 맞겠구나. 엄마는 저 안에 트럼프한테 많은 돈이 쏟아졌으면 좋겠다”며 동심을 훼손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