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vocation
이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occupation)으로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에게 무언가 엄청나게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던가? 안타깝게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 단어 중에 vocation이라는 말이 있다. voice에서 온 단어인데 “신의 목소리, 부르심”으로 “천직, 소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vocation은 뭐였던가?
[19개월 후 같은 병원: 신토불이 사나이(좌), 노란메리야쓰(우)]
과거의 나의 행적을 퍼즐처럼 맞춰보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준비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현재는 “엄마”라는 업(業)을 vocation이라고 믿고 살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생물학적으로 엄마가 되기야 하겠지만 21세기가 원하는 엄마의 소명(vocation)을 이루는데 갖춰야 할 덕목이 뭘까?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그중 제일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의 부모들까지 모두 역사가 된 후에 지쳐가는 지구를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근간이 되어야 다른 직업(occupation)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Sea Life Park는 내가 좋아하는 아담 샌들러와 드류 베리모어가 함께 나왔던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를 촬영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와이키키에서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며 “우와! 우와!”를 몇 번이나 질렀을까. 가는 길 자체가 예술이다. 끊임없이 바뀌는 바다의 모습과 이어지는 아찔한 절벽들이 ‘하와이는 처음이지? ’라며 우리를 이끌어주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감탄을 하며 운전하고 있을 때 앞에 달리는 차는 신혼여행 커플이신가, 노란색 컨버터블 차량에 지붕을 열고 따뜻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제대로 만끽하고 계셨다. ‘흠, 애엄마는 고르기 어려운 차다 좋을 때 즐겨라.’라고 주책 맞게 중얼거렸다.
주차비는 깔끔하게 선불로 5달러 내시고 입장하시면 되시겠다. 아이들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이층 버스에 열광했다. 우리도 돌아갈 때는 저거 타고 싶다고 한다. '얘들아, 진정해라. 엄마가 너희들을 위해서 차를 빌리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아이들은 뚜껑 없는 이층 버스가 신기해 보였는지 틈만 나면 조른다. 하긴 달리는 이층 버스에서 소리 지르는 철 부족 아저씨들을 보니 내가 봐도 신나 보이긴 했다. 처음에는 단체 관광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이층 버스는 트롤리 블루라인이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한 번쯤은 블루라인 트롤리를 타고 와 봐야겠다. 나도 저렇게 소리 지르리라.
일단 매표소를 통과하니 아이들은 사라졌다. 엄마는 그렇게 뛸 수 없으니 천천히 뒤를 따랐다. 그런데 신나게 들어갔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칫하며 서 있는 것이다. 노란메리야쓰는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가리키며 “엄마, 무떠워~ 무떠워.”하며 서 있다. 유리창을 통해서 우주복 같은 것을 입은 사람들이 상어한테 먹이 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무섭다면서도 신기해서인지 한참을 보고 있었다. 이 체험은 “Shark Trek (Star Trek에서 따 온 것 같다)”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이 쓰고 있는 헬멧은 특수하게 제작되어 있어서 산소가 공급될 뿐만 아니라 마이크와 오디오 기능으로 수중에서 호흡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상어들이 나타났다. “빠-밤, 빠밤빠밤, 빠-밤~” 나는 죠스의 주제곡을 효과음으로 넣어줬다. 아이들은 상어가 온다며 소리를 지르고 그리고 드디어 물 밑에 있는 사람들과 상어의 아이 컨택(eye contact)이 시작됐다. 묘한 기싸움이었다.
신토불이 사나이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자기도 하고 싶다고 시켜달라고 난리가 났다. 반대로 노란메리야쓰는 혹시라도 엄마가 자기만 두고 오빠와 저 물속으로 들어갈까 봐 근심 한 가득이었다. 노란메리야쓰를 안심시켰다. “이 액티비티는 아이가 8살이 넘어야 하고 보호자와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오빠는 못해.” 노란메리야쓰는 안심을 하고 신토불이 사나이는 생일이 지나지 않음을 탄식했다. 씨라이프파크에는 볼 수 있는 동물들도 많지만 이곳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바다 동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활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map을 따라서 순서대로 바다 동물들에게 가 보기로 했다. 군데군데 휴식 중인 동물들의 빈 공간이 눈에 띄였다. 표시판을 읽어보니 이 아이들은 안식년에 들어간 것이다. 참, 복도 많은 아이들이구나.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이 생각났다. 남편도 내 후년쯤에는 안식년도 아니고 안식월로 한 달 즈음 쉬고 싶다고 했는데 여기 펭귄한테 ‘형님’이라고 부를 노릇이다. 펭귄이 부럽기는 처음이었다.
한쪽에서 바다 거북이를 만져 볼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와주고 있었다. ‘staff’이라고 쓰여 있지만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이 분은 직접 거북이가 사는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그곳에 아이들이 오면 거북이를 살포시 들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그때까지 나는 거북이의 등딱지가 딱딱하니깐 대충 들어다 놨다 해도 별 감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아기 다루듯이 거북이를 매만져줬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동물을 대하는 모습 자체가 교육이었다. 감동이었다.
바다 생명체들의 향연 중에서 백미는 단연코 돌고래쇼다. 이 곳에서는 동물들과 함께 하는 액티비티는 별도로 참가비를 내야 하지만 돌고래 쇼는 입장료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매표 없이 스케줄에 맞춰서 지정된 장소에 오면 된다. 돌고래쇼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한 우리는 유리로 만든 수조의 규모에 놀랐다. 투명하기 때문에 물 밑바닥까지 다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돌고래 쇼가 시작되었다. 세 명의 여자 조련사가 나와서 그동안 갈고닦은 돌고래의 재롱을 선 보인다. 돌고래쇼가 다른 어떤 동물쇼 보다 감동적인 이유는 사람과의 '교감'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수조 앞으로 가서 수면 아래 돌고래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관람석 위쪽으로 와서는 돌고래가 물 위로 점프하는 모습도 지켜보며 환호했다. 미션을 다 마친 돌고래는 사육사에게 먹이를 받아먹고는 쿨하게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은근 예리한 노란메리야쓰는 저 돌고래는 이제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 역시 궁금했다. 저 뒤로 가면 뭐가 있을까?
돌고래가 쇼를 하는 중간에 깜짝 이벤트로 아기 펭귄이 등장했다. 얼마 전에 태어난 아기 펭귄을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조련사들은 마치 왕자님을 안고 나오는 유모들 같이 등장했다.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 아기 펭귄을 보며 사람들은 사진 찍느라 바빴다. 아기 펭귄도 물론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조련사들의 눈빛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눈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떻게 동물을 바라보는 눈에서 자기 새끼를 보는 듯한 눈빛이 나오는지 그저 신기하고 부러웠다. 저 모습이다! 진정한 vocation에 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나에게 씨라이프 파크는 동물을 구경하는 곳 이상의 감동을 줬다. 이 곳은 돈 내고 들어가는 관람객 중심이 아니라 거주하시는 동물들이 갑이셨다. 우리는 폐장 시간인 4시까지 동물을 보다가 놀이터에서 놀다가를 반복했다. 어디를 가나 놀이터가 있으면 아이들이 있으니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되었고 엄마에게는 아이들이 한눈에 보이는 휴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그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닌지 놀이터 주변에는 전 세계 다른 나라의 부모들도 나처럼 쉬고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들 따라다니는 일이 힘든 건 사실이다. 놀이터에서 노는 기술도 늘었다. 엄마가 그저 근처에만 앉아 있어도 이젠 미끄럼틀에서 만난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아기들을 도와줬다. 집에서 둘은 싸울지언정 밖에서는 서로 의지했다.
더위에 살짝 지칠 때 즈음,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아까 돌고래쇼에서 진행을 봤던 조련사가 돌고래들과 쉬고 있었다. 수조에서 쇼를 마친 돌고래는 수조와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 바다로 나가 있었다. 다시 한번 감동이었다. 일을 마친 돌고래가 바다에서 자기 맘대로 놀 수 있다니!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여기 돌고래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돌고래가 나라를 구하냐고 심각하게 물어서 나를 웃겼지만 결론은 여러모로 놀라웠다.
신토불이 사나이는 Shark Trek을 못해서 끝내 아쉬워했다. 엄마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돌고래와 뽀뽀하는 모습을 보며 저것도 자기는 할 수 없냐며 슬퍼했다. 내 마음도 아팠다. 어떤 체험은 나이가 어려서 못하고 어떤 체험은 시간이 늦어서 못 했고 또 어떤 체험은 엄마가 함께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동생이 누군가와 함께 기다려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없어서 못했다. 그러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말대로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는 없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졸지에 다음에 다시 오겠노라. 그때는 돌고래와 수영도 하고 상어도 보러 물 밑으로 내려가겠노라. 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를 했다. 그래서 나는 조만간 하와이를 또 다녀와야 한다.
이제 곧 4시가 되면 문을 닫으니 출구 쪽으로 이동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신토불이 사나이의 아쉬운 마음을 알았을까. 멀리서 놀고 있던 물개들이 다가와서는 신토불이 사나이와 노란메리야쓰에게 인사를 해 줬다. 정말 신기했다. 먹이를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끽끽끽끽 소리를 내니 가까이 와줬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이 밀었다. 아이들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물개를 불렀다며 신기해했다. 나 역시 놀랍기도 하고 물개들에게 고마웠다. 퇴장할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뒤늦게 물개와 통성명을 했으니 아이들은 발걸음이 더더욱 안 떨어졌다.
우리는 사전 정보 없이 현장에 와서 입장료 내고 들어왔는데 구경하다 보니 연간회원권을 가진 아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 연간회원권 가격(대인 49.99, 소인 39.99달러)과 1회 입장료(대인 39.99/소인 24.99 달러 as of 2017.9)가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고는 많이 아쉬웠다. 다음에는 하와이에 오자마자 연간 회원권 끊고 일주일에 한 번은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더 커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테니 엄청 기대가 됐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올 때 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는지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고 나는 잠시 차를 세우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바다거북을 정성스럽게 안아 올린 스탭, 돌고래와 교감하던 조련사, 아기 펭귄을 안고 조심조심 걸어 나오던 조련사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vocation을 떠올리며
'내 새끼들도 바다거북처럼, 돌고래처럼, 펭귄처럼 소중하게 키우자. 그들처럼...' 라고 생각했다.
Sea Life Park가 나에게 준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