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어른'의 역할
유례없는 4월 개학과 온라인 수업을 겪은 선생님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영상 혹은 이와 관련된 기기를 다루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인 선생님들은 차치하고도, 평소 ppt조차 잘 활용하지 않으시는 연로한 선생님들은 이번 학기가 역대급으로 힘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다룰 줄 알아도 이를 수업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 처음에 다들 방향을 잃고 헤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평소에 비해서 학생들이 학교를 오는 빈도수 자체가 적다보니, '교사의 입장에서 편하지 않나'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지역에 따라 지침이 달라, 전일등교 한 곳도 있지만,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의 학교들은 대부분 적게는 주1회, 많게는 주2회 등교를 실시하였다. (물론 소규모 학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 학교와 같은 경우 아이들이 일주일에 딱 한 번, 1회 학교를 왔는데, 8번 보고 나니 어느새 방학이랜다. 아이들 입장으로서는 2주일도 되지 않아 방학을 한 셈이다.
나는 여기서 '선생님도 힘들어요'와 같은 호소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왜 이런 형태로 온라인수업을 지속하면 안되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선생님, 어떡하죠?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해요.
(일부) 등교수업을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아 걸려온 학부모의 전화였다. 대상 학생과 같은 경우 영재교육원에서 공부를 할 정도로 성실하고 똘똘한 아이었는데, 몇 주 전부터 온라인 과제를 제출하지 않더니, 급기야 등교수업마저 거부해버리는 일이 생겨난 것이다. 전화를 받고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학교가 재미 없나? 내가 너무 무섭게 했나?' 였다. 방역 지침 준수와 등교 진행을 동시에 해버림으로써, 학교에서 할 수 있는 활동에 제약이 많이 생기기는 했다. 짝이나 모둠활동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오, 일정 거리 두기도 철칙이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방역 지침을 어기는 행동을 했을 때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등교 수업 한 번에 바로 보이콧을 한 것은 너무하잖아! 당황스러워하는 어머님께 일단 제가 학생과 전화통화를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학부모와의 전화상담도 아니고 학생과의 전화상담은 처음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애가 학교에 안 오겠다는데, 뭔 짓인들 못하랴.
여보세요?
응, OO아, 뭐 하고 있어?
저 그냥... 책 읽어요.
오늘 시간 되면 학교에 올래? OO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거부할 확률이 팔할이라 생각하고 던진 말이었는데, 다행히 아이가 오겠다고 했다. 아직 래포 형성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전화 상담은 영 힘들겠다는 판단 하에 결정한 일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두 시쯤 됐을까, 아이가 쭈뼛대며 교실 앞에 나타났다. 일단 나는 어른이라는 권위와 선생님이라는 위치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가 위압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솔직한 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선 따뜻한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평소 아이와 상담할 때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타주며 일상을 물었다. 요즘 영재원 수업은 어떠니, 동생과는 잘 놀아주니, 집에 있으니 심심하지 않니 등…. 당연히 단숨에 친해지진 않았다. 그냥 내 반언어적, 비언어적 행동을 통해 '이 선생님이 지금 나를 혼내려고 부른게 아니구나'라는 인상을 주고싶었을 뿐이다.
OO아,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다지.
OO이가 학교에 오고 싶지 않다고 해서 선생님이 많이 놀랐어. OO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봐 걱정도 되고. 선생님이 OO이 걱정해도 되는거지?
네….
OO이가 계속 학교에 오지 않으면 선생님이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은데, 학교에 오기 싫은 이유가 있을까?
엄마가 하라는대로 하기 싫어서요. 아빠도 싫고, 엄마도 싫어요.
결국 가정의 불화가 그 문제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이 학교에게로까지 번진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만약 현재와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이의 고통받는 심정을 더 빨리 알아차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이유가 단지 지식 전달에 그치는 일이었다면, 현재 키오스크가 종업원을 대체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우리의 역할을 대체했으리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선생님의 역할이 있다. 바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어른이 되어주는 것이다. 365일 평안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또다른 어른'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부모님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존재가 충분하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가정이 있고, 조금은 부족할지도 모르는 안식처의 나머지 조각을 채워주는 것이 선생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정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면, 그 균열에서 생기는 결핍을 보수해주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아이가 지속적으로 학교에 나왔더라면, 아이의 마음 한 구석에 선생님은 '또다른 어른'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교육학 용어로 '래포 형성'이라고 한다. 온라인 수업으로는 그 '래포'를 형성할 수 없었기에, 아이의 마음 속에 '또다른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사춘기 아이와 생기는 갈등은 부모의 온전한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이럴 때 부모 다음으로 아이에 대해 잘 알아주는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도움이라고 쓰고 협력이라고 부르겠다. 아이의 학교에서 행동, 교우 관계, 평소 선생님에게 하는 말같은 것을 보태면, 아이에게 생긴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더군다나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어른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가. 한 아이를 기르는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옛 말이 있듯이, 한 초등학생을 기르는 데는 세 어른이 필요한 것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선생님.
지금이 그렇다. 온라인으로 '래포'를 형성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한가? 물론 아닐 것이다. 다양한 시도를 하다보면 새로운 방법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수업에 대한 명확한 매뉴얼 혹은 지침조차 없는 현 시점에서는 온라인만으로는 래포형성을 할 수 없고, 아이에게 '또 다른 어른'이 되어줄 수 없다. 어제 유은혜 장관이 온라인수업을 중심으로 한 미래교육 방향을 이달 내에 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얼개를 보아하니 온전한 대면수업 체제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 체제대로 계속 간다면, 올해의 아이들에게 '제 3의 어른'은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선생님의 역할이 작아짐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을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얼굴을 매일 마주보고, 정서를 교류하고, 친해지는 온 과정을 대신할 무언가가 절실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