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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ttyfree Sep 15. 2021

'작가의 말' 거절당한 사연

본문 쓰기보다 어렵네요






우리나라에 내가 사모하는 작가님들은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먼 영역인 sf영역의 소설을 집필하시는 김초엽 작가의 다음 작품은 항상 기다려진다. 최근에 읽은 <지구 끝의 온실> 역시 기대만큼 좋아서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작가님께서 며칠 전 스토리에 이런 글을 올리셨다.


작가의 말 썼다!! (책 낼 때 가장 큰 고난...)



와, 이런 대작가님도 작가의 말 쓰는 걸 힘들어하시는구나. (물론 나와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작가의 말'을 처음 썼을 때의 황당한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내 평생의 독서 메이트인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책을 고를 때 항상 '작가의 말'부터 읽어야 하는 법이라고. 나는 그 '작가의 말', 통칭 '머리말'을 꼬박꼬박 읽는 사람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을 읽을 때 '작가의 말'을 굳이 읽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적어 보내 주세요. 800자 내외로요!


나에게 '작가의 말'을 적어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는 적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막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런 나의 막막함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내 작품을 들여다본 지 넉 달이나 지났다는 사실이다. 집필할 당시 샘솟던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말을 적는다는 것이 상당한 고난이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은 점 : 다음 작품에서는 작가의 말을 좀 더 일찍 적을 것.) 주어진 일은 받자마자 해치우는 습관이 있는 내가 유일하게 미적거린 일이 바로 '작가의 말'을 적는 일이 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출간은 다가오고 있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어야 했다. 이럴 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선배 작가의 글을 참고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집 근처 서점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도서의 작가의 말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살펴보려고 했건만, 책이 다 비닐 옷을 입고 있었다. 주 독자층이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상해를 입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일이겠지. 그렇지만 여기에서 포기하긴 일렀다.




나는 개학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다가가지 않았던 우리 반 학급문고로 갔다. 가지런히 꽂힌 필독도서 책들 틈에서 작가의 말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그려낸 <양파의 왕따 일기>, 어렸을 때 밤새는 줄 모르고 읽었던 <마당을 나온 암탉> 전쟁을 모르고 자란 세대들에게도 그 시절의 아픔을 따뜻하게 전달한 <그 여름의 덤더디> …. 이런 훌륭한 작품들의 '작가의 말'을 참고하면, 나도 그럴듯한 말을 적어 내릴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 생각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야심 차게 후루룩 적어서 낸 작가의 말이 단박에 퇴짜 맞은 것이다.

물론 편집자님께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다소 조심스럽지만'으로 시작되는 편지는 나에게 조심으로 다가오는 법이 없다. '불쾌하실지도 모르겠지만'의 동의 어구쯤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까. 내가 적어 내린 '작가의 말'이 본문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메일의 요지였다.




글을 쓴 것도 나요, 출간 기획서에 기획의도를 적은 것도 나인데, 본문의 메시지를 통째로 오인하고 있었다니. 사실 오인이었다기보다, 유명 작가들의 작가의 말을 어설프게 흉내 내느라 가중치를 엉뚱한 데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원고를 뒷전으로 둔 나를 글의 부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의 학교에서의 모습을 말하면 '어머, 전혀 몰랐어요.'라고 말하며 난색을 표했던 학부모의 심경을 언뜻 알 것 같기도 했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인데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요.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하곤 했다. '아이는 자라는걸요.' 하지만 내 원고는 아이와 달리 자라지도, 사춘기를 맞지도 아니한다. 그렇다면 다 내 잘못으로 환원이 되는 것이다. '다소 조심스럽지만'으로 시작된 퇴짜 메일이었지만 나에게 기분 나빠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내 자식에게 미안해하기 바빴으니까. 나는 그제야 내 원고를 위한, 원고에 의한 작가의 말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아이 소개서'를 쓰는 기분으로 적어내리니,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하고 가슴이 찡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완성된 작가의 말을 끝으로, 진정한 탈고가 끝이 났다. 아, 본문보다 힘들었던 작가의 말 쓰기였어.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말'을 쓰고 나니, 내 작품이 더 좋아졌다. 내가 온전히 글의 큐레이터가 되어 작품을 해설해주는 느낌이었달까. 이 글은 이런 의도에서 썼고, 저런 시각에서 읽어주면 좋겠어요. 이 글을 읽는 어린이는 이렇게 자라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무엇보다 이 글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되짚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지는 출간 일정에 지쳐있었고, 스스로의 작가로서의 재능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남들에게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회의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고, 어쩌면 이번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슬픈 예감까지 들었다.



물론 작가의 말 작성 하나로 그런 회의와 번민, 고뇌와 같은 것들이 단박에 해갈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출간 이후가 작가로서의 나의 인생에 더 긴 고통의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삶을 견뎌낼 수 있을만한 이유가 있어 그럭저럭 다행이다. 며칠 전 다녀온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큐레이터가 나에게 묻더라. 만약 작가가 된다면 '일생일대의 명작 단 한 작품을 남긴 작가'가 될 것이냐고, 아니면 '소소하게 중박 치는 작품을 죽을 때까지 남기는 작가'가 되겠느냐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했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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