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기요 Oct 16. 2020

너의 과거와 나의 지금과

너무도 같기에 두려워 겁시 나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28살에 결혼을 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결혼이라니! 그때 나에게 결혼은 "화성에서 사람이 살 수도 있대" 같은 먼 미래 얘기였다. 남자 친구랑 헤어진 뒤 한 달만에 6킬로가 빠지고 얼굴엔 때 아닌 성인 여드름 흔적이 가득했다. 온 동네방네 실연당한 사연을 떠벌리며 힘든 감정을 추슬렀다.


결혼식에 가긴 가야 하는데 가기가 싫었다. 축하하는 마음은 당연히 1도 없었고, 얼굴만 아는 동창들과 어색하게 인사 나누기도 싫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친구의 행복을 빌어줘? 가식이고 위선이었다. 그래도 사람 된 도리가 있으니 결혼식에 가긴 갔다.


친구는 눈치가 빠른 건지 당시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건지 결혼 준비 과정을 일절 공유하지 않았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법인데 딱 봐도 내 상태가 영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심지어 4년 교제했다는 남자 친구 얼굴을 결혼식장에서 처음 봤다. 그다지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라 유치하지만 살짝 마음이 놓였다.


결혼이 이런 거로구나, 결혼식장은 이렇게 생겼네. 그때 처음 경험해 봤다. 장소도 충정로인지 시청인지 멀어서 트렌치코트에 구두 신고 '아 정말 가기 싫다'를 되내며 식장에 도착했다. 어색한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축의금 내고 신부대기실 가서 영혼 없이 사진도 찍었다. 신부 입장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뱀처럼 스스스 자리를 떴다.


친구의 신혼 생활도 노관심이었다. 친구는 이미 완성형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모든 게 진행형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끝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다. 친구의 신혼은 궁금하고 부럽기도 한데 함부로 클릭할 엄두가 안 나는 콘텐츠였다. 스스로 초라함을 느낄까 봐 일부러 거리를 뒀다.


3년쯤 지나서였다. 드문드문 연락은 하고 지냈는데 얼굴 볼 일은 없었다. 삶의 영역이 너무 달라져서였다. 친구의 신혼집은 방화역이었다. 5호선 끝과 끝이라 찾아갈 엄두가 안 났는데 응암동으로 독립을 하면서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3년 만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신혼집의 첫인상은 '정말 좁다'였다. 방 한 개짜리 아파트에 온갖 짐이 가득 채워져 있고 퀸 사이즈 침대가 거실로 분류된 공간에 있었다. 레지던스 호텔 같은 구조였는데 여기서 둘이 살면 답답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가서 찍은 사진, 방 입구에 놓인 양키 캔들, 처음 보는 광파 오븐에서 낯설고 은밀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본 친구는 살이 많이 쪄 있었고 처음 마주한 친구 남편은 "우리 혜미 살 많이 쪘죠"하며 친구를 놀렸다. 상을 치운 뒤 남은 피자와 샐러드를 싱크대 앞에 서서 먹는 친구를 보며 난 저러지 말아야지 했다.


그때 신혼집이 요즘도 가끔 생각난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이 꼭 같은 구조에 같은 평수다. 혼자 살던 집에 둘이 살게 되었고 지금은 셋이 됐다. 친구가 아기 옷과 장난감을 주러 우리 집에 온 날, 지금 내 모습이 친구 눈에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예전이면 이런저런 감상에 빠졌을 텐데, 친구랑 맥주 한 잔 하면서 "나 너무 힘들어!"를 외치고 싶을 뿐이었다. 간만에 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난 또 역시나 내 이야기만 숨 가쁘게 늘어놨다.


36년을 중학교 선생님으로 살아오신 엄마는 '진도'라는 말 참 많이 쓰셨다. 결혼도 임신도 육아도 다 삶의 진도야. 해치워야 할 숙제니까 진도 빨리 빼는 게 장땡이야. 지금 나는 육아의 진도를 나가고 있다. 진도가 빠르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니고 느리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뭐 그렇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세세한 결은 달라도 결국 비슷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것 같다. 삶의 수순이라는 게 이런 걸까. 먼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친구들의 현재가 나에겐 곧 스포일러일지 모른다. 친구의 과거가 지금 내 모습과 닮아 있는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재택이 싫은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