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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Oct 14. 2020

연애할 땐 연애만 해

고민 같은 거 나누지 말고

찐연애를 두 번 해봤다. 20대 중반에 한 번, 30대 초반에 한 번. 둘 다 3년을 만났다. 금사빠에 비혼 외치면서도 결혼이 내심 하고 싶었던 모순쟁이 나는 당연히 그들과의 결혼을 꿈꿨다.


결혼 4년 차에 접어든 요즘. 가끔 그들과의 결혼 생활을 시뮬레이션해 본다. 그리고 몸서리친다. 아이구야 세상에나... 대체 얼마나 큰 불행을 피해 간 거니. 고속도로에 날아든 대형 낙석을 간발의 차로 피한 기분이다. 날 걷어차 준 구남친1과 구남친2에게 감사한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까지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큰절을 하고 싶어 진다.


구남친1탄과 2탄은 외모와 성격은 달랐어도 성향이 참 비슷했다. 착하고 무능하고 대책 없었다. 날 되게 많이 좋아해 주긴 했다. 내 지랄 맞은 성격도 잘 참아줬다. 날 좋아하고 잘 참아주는 게 고마운 건 맞지만 이성관계에서 큰 메리트로 작용할 건 또 아니었는데. 내가 가장 싫어하고 한심해하는 게 그들의 코어였다.


의지박약, 불성실함, 추진력 없음, 용기 없음, 대책 없음


구남친1은 20대 중반에 만났다. 나보다 네 살이 어렸으니 대책 없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니는 학교가 맘에 안 든다며 군대에 있을 때 수능을 한 번 더 봤다. 그 결정이 너무 한심스럽고 못 미더우면서도 위로 넘기는 문제집까지 사서 보내준 게 나였다. 공부도 안 하는데 수능을 잘 볼리가 없지, 혀를 끌끌 차면서 기출문제 프린트해서 힘내라는 편지와 함께 보내준 것도 나였다(병신!).


구남친1은 어리기라도 했지. 서른 살에 만난 구남친2는 의지박약 경연대회 같은 게 있으면 부전승으로 결승까지 갈 사람이었다. 그림이 업이었는데 마감일을 제대로 지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 다니던 출판사에 남친을 작가라고 소개하고 일감을 따오기도 했던 나는 그의 마감일이 다가오면 우울증이 도졌다.


내 마감도 아닌 남의 마감이 다가올수록 피 말렸던 기억. 늦은 밤 집 앞에 찾아온 구남친2는 원래 300컷쯤 그리기로 했는데 작업 일정을 도저히 맞출 수 없어 100컷 정도 줄이기로 했다며 주인 눈치 보는 강아지마냥 내 표정을 살폈다. 작가님과 출판사에는 양해를 구했어... 눈이 턱 밑에 달린 것처럼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때 차 버릴 걸. 매번 마감할 때마다 <마지막 잎새> 여주인공 코스프레하는 너 같은 인간은 미래가 없어. 널 만나는 건 내 인생의 낭비야 라고 쏘아붙이고 이만 총총~~! 해 버릴 걸. 2013년인가 2014년의 김나영은 눈물을 삼키며 "그래 잘했어” 하고 발로 차도 시원찮을 그의 등을 쓰담쓰담해주고 있었다. 잘하긴 뭘 잘해..


얼마 전 집 근처 공원에 갔다가 문득 6년 전 일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였는데, 구남친2의 마감일이 임박해 우울증이 한껏 도졌을 때였다. 나는 왜 골라도 이런 남자를 골랐을까.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연애란 내겐  없는 걸까. 사랑은 하는데 왜 앞날이 보이지 않지? 그의 스트레스와 고민이 함께 덮는 이불처럼 나를 덮고 있었다. 미세먼지 심할 때도 아녔는데 내 주변 공기만 뿌옇게 느껴졌다. 엉엉 울면서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병신, 세상에서 가장 병신은 과거의 나다. 연애할 땐 연애만 할 것이지, 왜 상대의 고민을 내 것처럼 끌어안고 괴로워했을까? 니가 너무 좋아, 넌 너무 예뻐, 너 없인 못 살아, 매일 뷔페 먹듯이 듣고 싶은 말 잔뜩 듣고 즐겁게 데이트하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서로 할 수 있는 것 다 해볼 걸. 그냥 그렇게 즐기며 연애할 걸.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녔는데.

그때 날 보는 엄마 표정이 이랬던 것 같다

결혼하면 상대의 고민을 다 끌어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신기하게 남편에겐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당신 고민 / 내 고민을 반반 나눠 생각하곤 한다. 그건 남편이 구남친들처럼 대책 없고 불성실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맘에 안 드는 걸 나열하자면 오 절 육 절까지도 가능하지만 남편은 적어도 자신의 문제를 빈 공책처럼 들고 나에게 달려오지 않는다. 피곤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직장생활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에게 전가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된 성인으로서 각자의 몫을 해낸다. 일을 하고, 약속을 지키고, 징징거리지 않는다.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며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 뼘 정도 넓어진 것 같다. 그 한 뼘에 연애할 땐 몰랐던 나의 병신 같음이 포함돼 있다. 그의 고민을 나누려 하지 마. 그럴 시간에 자막 없이 미드 보면서 영어 회화나 한 줄 더 익히라고! 아님 나가서 놀아. 고민을 전염시키지 않는 사람을 만나.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건 사랑에 빠졌던 과거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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