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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Nov 18. 2020

혼자이고 싶지 않았던 주말

지난 주말 모처럼 자유가 주어졌다. 남편이 반나절이라도 편히 쉬라며(!) 아이와 단둘이 시댁에 갔다. 좋은데 한편으론 서운하고 후련한데 배웅하며 벌써 외롭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뭘 하나. 일생일대의 기회를 허투루 날려 보낼 수 없으니 외로움은 얼른 털어내고 뭔가 해야만 했다.


원래 보기로 했던 후배와 약속이 파투 나자 벙 쪘다. 육아 중인 지인들은 나와 같은 처지이니 만날 수 없고, 육아를 하지 않는 친구들은 주말 스케줄이 있을 것이고, 어찌 지내나 궁금하긴 한데 가끔 모임에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보고 싶다"며 연락을 하기도 뻘쭘했다. 주말에 불쑥 보자고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싱글인 친구들을 떠올리다 그만두었다. 만나면 신세한탄 봇마냥 <어이구야 처량한 내 신세>만 반복하게 되는데 이런 만남이 뭐가 즐거울까 역지사지 해보니 역시 아니었다. 말하는 사람도 지겹고 듣는 사람도 지겹고 플러스보다 마이너스일 때가 많았다. "너처럼 사느니 결혼하기 싫다"라던 친한 언니의 말은 나의 멘탈에 돌팔매로 날아왔다. 불행만 나열해 놓고 "아니야 나 나름 행복해"하면 우스울 것 같아 결혼과 육아에 대한 되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내가 더 어른인 척 했다. 여하튼 우스운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던 날>을 예매했다가 혼자 보면 왠지 우울할 것 같아 취소했다. 얼마 전  <소리도 없이>를 혼자 봤는데 너무 우울하고 힘들었다. 중간중간 나가고 싶은 걸 참으며 봤다. <내가 죽던 날>도 힘든 소재라 혼자 볼 엄두가 안 났다. 영화 취소하니 더더욱 할 게 없었다.


맥주 사오고 삼겹살 시켜서 넷플릭스 볼까? 시댁 홈파티 메뉴가 삼겹살이라고 해서 나도 왠지 삼겹살이 땡겼다. 혼자 있는 주말을 컵라면으로 대충 때우면 왠지 서러울 것 같았다.


쿠팡 이츠로 삼겹살 1인 세트 주문하고, 편의점에서 맥주 4캔을 샀다. 문명의 이기 쿠팡 이츠는 어찌나 빠른지 동네 한 바퀴 돌고 맥주 사서 집에 오니 바로 도착했다. 별 기대 없이 시킨 삼겹살은 1만8천 원에 쌈채소와 명이나물, 서비스 파김치까지 있어 만족스러웠다. 저녁 시간도 아녔는데 갑자기 허기져서 식탁에 선 채로 쌈을 싸서 허겁지겁 먹었다. 엄청 맛있었다.


재주문 의사 100프로 (。・∀・)ノ゙


배가 좀 찬 뒤 <반도>와 <녹터널 애니멀스>를 연달아 봤다. 혹평 일색이던 <반도>는 삼겹살처럼 기대 안 하고 봤더니 생각보다 괜찮았고, 두 번째 본 <녹터널 애니멀스>는 역시 띵작이었다. 여주인공 수잔의 모순된 면(부모의 가치관을 혐오하나 결국 그 가치관대로 살게 됨), 자신의 비겁함과 부족한 확신을 "시니컬함"으로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것 등이 상당히 공감됐다. & 제이크 질렌할은 입 냄새만 안 나면 키스하고 싶은 배우다.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외롭지 않았다. 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나려 했다면 2시간은 오고 가는 데 썼을 것이고 5시간은 신세한탄과 과음에 썼을 것이다. 다음 날 내가 또 무슨 말을 했지 하며 이불킥하는 데 쓸 에너지까지 생각하면 혼자 있길 잘했다 싶었다.


아기는 가장 예쁜 모습(=코코 자)으로 집에 왔고, 모처럼 가족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온 남편은 자상하고 유머러스했다(내가 좋아했던 면은 이런 건데 이게 전체가 아닌 일부라는 걸 결혼 후에 깨달았다 ^_^).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와인 한 병을 비웠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부부관계도 했다. 숙제처럼 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한 거라서 진심으로 좋았다. 내 몸과 마음이 모두 100점을 외쳤다.


혼자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영화도 보고, 전혀 외롭지 않았던 7시간이었다. 혼자이고 싶지 않았는데 혼자여서 좋았다. 가끔 이런 시간도 필요하구나.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해? 하는 날 선 마음이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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