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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May 06. 2021

감 놔라 배 놔라 둘째 낳아라

- 하나는 너무 적어, 둘은 있어야지 

- 둘째는 마흔 전에 낳아야 하는데, 00 이네는 계획 없어요?

- 형제 없는 애는 왠지 짠해 

- 다 자기 먹을 숟가락은 갖고 태어나는 거야~ 하나 더 낳아!

-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둘째 생각해 보자

- 낳는 게 힘들면 입양이라도 하고 싶어 


근래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이 "둘째 계획"을 들먹이며 한 이야기다. 둘째 낳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은 나와 같은 육아의 주체이자 신생아 케어의 일등공신이었던 친정 엄마뿐이다. 네 몸 망가지는 게 싫다, 그리고 난 이제 육아할 만큼 했다 라는 게 엄마의 주장이다. 맞다. 날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건 엄마뿐이지. 


애 낳아서 키울 사람(=나예요) 생각은 1도 안 하면서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수준으로 "둘째 계획" 들먹이는 분들에게 공격의 의도 1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본다. 


1. 애 누가 낳아요? 

직장 다니면서 애 키우는 제가 낳아요. 마흔이 코앞인 제가 낳아요. 돈 모으느라 힘들어 죽겠는 제가 낳아요. 부업까지 하고 있는 제가 낳아요. 출산 후 불어난 체중 감량하느라 죽기 살기로 노력했던 제가 낳아요. 회음부 재봉합까지 했던 제가 낳아요. 


2. 애 누가 키워요?

저랑 저희 엄마가 키워요. 육아의 필수 조건이 뭐게요? 친정 엄마의 체력, 친정 부모님의 경제력, 친정집과 가까이 살 것이에요. 저는 운 좋게도 모든 조건이 성립하는데, 이 조건을 만들어주신 엄마가 둘째는 생각지도 말래요. 내일모레 칠순인데 더 이상의 육아는 원치 않으신다고요. 저희 엄마도 이제 좀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남들처럼 한 달에 백오십, 이백은 고사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 드리고 있는 것도 죄송해 죽겠단 말이에요. 제발 저랑 저희 엄마한테 애 더 키우라고 하지 마세요. 


3. 자기 숟가락은 가지고 태어난다고요?

태어나지도 않은 애는 그렇겠죠. 문제는 제 숟가락이에요. 저는 완전한 경제적 독립체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배우자가 무슨 일을 당해도,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도, 아이가 다치거나 아파도, 저는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야 해요. 사기업 다니는 여자가 애 둘 낳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요? 커리어는 스탑이고, 안 잘리면 땡큐예요. 직장에 민폐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진 않아요. <잘리기 직전까지 존버하는 애엄마>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4. 눈 크게 뜨고 잘 봐요 이게 현실이랍니다 

애를 낳는 건 산모가 목숨을 거는 일이고, 애를 키우는 건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행을 떠안는 일이에요(이게 나쁘단 건 아닌데, 힘든 일임은 분명해요). 가난해도 행복한 아이로 키우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솔직히 자신 없네요. 가난이 곧 불행인데 어떻게 행복해요? "뚱뚱해도 날씬한 사람이 되렴"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가난이 행복과 연결되는 일은 없어요.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이 적다고 행복할 리도 없어요. 


통장을 쪼개고, 짧은 지식으로 여기저기 적은 금액을 투자하고, 지속적인 벌이를 고민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단속하며, 대단지 아파트 전세 시세를 기웃거리는. 과도한 교육열은 지양하면서도 너무 뒤처지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계속 돌아보게 되고, 아이의 취향과 소질을 발견 못하고 지나치는 일은 없는지 곱씹게 되는. 아이가 원하는 만큼 기회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마음 편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이 모든 기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지금도 이런 삶을 살고 있는데, 

여기서 더더더 노력하고 희생하라구요? 


제가 왜요?


아참, 너무 돈돈돈 자본주의 타령만 한 것 같은데 이거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고 어렵고 힘든 조건 아시죠? 애를 낳아서 잘 키우려면 부부 사이가 정말 화목해야 해요. 인성 훌륭한 엄마 아빠, 서로를 이해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부부, 이웃 사회 국가 더 나아가 지구와 우주까지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엄마 아빠여야 애를 잘 키울 수 있다구요(노력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여튼 위의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무슨 <세상 편하게 아무 말하는 대회> 나온 것마냥 둘째를 낳으라는 거예요?


-그래도 자식은 예쁘잖아?

예쁘죠. 너무 예뻐요. 하지만 하나 더 낳고 싶을만큼은 아니에요.

이런 내가 비정한가요? 모성애가 부족한가요?

엄마 될 자격이 없는 모진 여자 같나요? 


무슨 권리로, 무슨 근거로

하루하루 최선 다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왜 네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느냐"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평가와 비난의 잣대를 들이밀어요? 


"차라리 내가 낳고 싶다"라고 말하는 아빠들도 있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인 거, 스스로도 알죠? 


말도 안 되는 부채감을 

나에게 짊어주지 말아요.

이제 제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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