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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Apr 13. 2021

그대여 나와 같다면

주말에 영화 <그녀의 조각들>을 봤다. 주인공은 아이가 나오고 싶을 때 나오게 해주고 싶어서 가정분만을 선택한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아이는 곧 숨을 거두고 만다.


15분의 오프닝이 너무 처절하고 괴로워서 보다 말다 뒤로 감았다 빠르게 재생했다 하다가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연출과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여자가 힘들게 아이를 낳는 것, 아이가 아프거나 다치는 것, 죽는 것을 영상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 일 이후 주인공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울며불며 누군가를 탓하지 않을 뿐, 상실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모유가 흐르고 성인용 기저귀를 찬 상태로 직장에 복귀해 일상의 리듬을 되찾으려 한다.


아이를 잃어서 가장 힘든  엄마인데, 주변 사람들이   도와준다. 남편은 아기를 위해 끊었던 들에 다시 손을 대고 고인 감정을 해소할 데가 없어 엇나가기 시작한다.  봐도 피곤한 성격의 친정 엄마는 가정분만을 도와준 조산사를 고소하라며 난리다. 그게 엄마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치유할  있는 방법이라며.


저마다 주인공을 위로한답시고, 혹은 함께 슬픔을 나눈답시고 하는 말과 행동들이 너무 폭력적이다. 가장 슬픈 사람 앞에서 더 큰 슬픔을 토로하는 것이나, 조산사의 잘못으로 아이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누군가" 이 잘못을 뒤집어쓰고 책임을 져야만 사건이 끝나는 것처럼 타깃을 정해 몰아붙인다.


제발 가만히 좀 있지. 주인공이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기 전까지 옆에서 들쑤시지 좀 말지. 남편이고 친정 엄마고 이웃 사람들이고 어찌나 도움은커녕 작정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 같은지 그들 각자의 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보면 볼수록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냥 문득, 다른 상황에서도 결론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날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랐더라면, 주인공 가족은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게 지냈을까? 친정 엄마는 사사건건 자신의 육아관을 주입하며 주인공을 닦달했을 것이고 자기감정에 빠져사는 남편은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아내가 자신을 외면한다며 비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내가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있을 때, 그 존재를 나보다 더 생각해야 할 때, 나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의 민낯이 보인다. 엄마라는 굴레를 짊어진 순간 세상보다 가족이 더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그것밖에 못해?’ 내지는 ‘엄마인데 왜 저럴까’ 하는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작은 구덩이를 파서 잠시 숨고 싶다. 억울하다고 불평할 기운도 그걸 들어주는 사람도 없으니 잠시 혼자 있고 싶을 뿐이다.


주인공은 결국 남편과 멀어진다. 자신은 동료이자 팀원이라며 주인의식을 강조했던 남편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게 더 시급했다. 주인공은 법정에서 조산사에게 잘못이 없음을 밝히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인정한다. 주인공을 미치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친정 엄마도 이를 받아들인다. 아이를 잃은 슬픔과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사람은 엄마이고, 아무도 그 힘든 싸움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 <나와 같다면>의 후렴구가 계속 맴돌았다. 임신 출산 육아에 있어서 만큼은 “그대여 나와 같다면” 이게 참 어렵다.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데, 이게 별 도움이 안 된단 걸 육아를 하며 깨달았다. 엄마의 역할은 너무 크고, 그래서 도움받고 참견당하고 비난받고 평가당할 일이 너무 많다. 아무도 나와 같지 않기에 “그대여 나와 같다면”이라는 전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나와 같지 않다. 같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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