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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Jul 03. 2021

팔자라는 것

예전엔 '팔자'라는 말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애 키우며 회사 다니는 선배들이 "다 팔자야"라며 서로의 처지를 위안할 땐 안쓰러움보단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는 반면교사의 마음이 컸다. 엄마를 비롯한 어른 아줌마들이 그 말을 할 땐 인생에서 맘에 안 드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도려내지 못한 실패자의 초라한 변명 같았다.


서른도 안 됐을 때다. 동네 친구가 같이 해장이나 하자며 주말 아침에 불러냈다. 술기운 뿜어내며 쌀국수를 마시고 있는데, 불쑥 친구가 낯선 결혼관을 꺼냈다. 그냥저냥 아빠 같은 남자 만나서 지지고 볶고 살 것 같은데, 애는 꼭 낳을 거라고. 당시만 해도 결혼은 물론이요 애 낳는 건 <인터스텔라> 같은 디스토피아적 미래였던 나는 쌀국수 그릇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홱 쳐들었다.


애를 꼭 낳겠다고? 왜?

그냥, 애가 없으면 살다가 이혼할 것 같아. 애라도 있어야 결혼 생활 유지가 되지 않을까


충격. 대충격이었다. 서른도 안 된 친구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그러니까 정리하면 결혼은 곧 불행인데 그 불행을 견뎌나가려면 애가 필요하다는 거지? 서로의 책임감과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이니까?


"그게 다 팔자지, 뭐"

길가다 비둘기 시체라도 본 양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던진 마지막 일갈이었다. 얘 입에서 팔자라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팔자라고? 그게 뭔데? 따지듯 되묻고 싶었지만 쌀국수 국물을 들이켜는 친구 표정이 너무 담담하고 한편으론 평온해 보여서 '나도 모르는 팔자의 뜻이 더 있나 보다' 하고 재빨리 생각을 추슬렀다. 그 뒤에 이어진 대화는 (현재 기준에서) 나의 말도 안 되는 결혼관이었다. 절대 양가 도움은 안 받을 거고, 결혼은 둘이서 하는 거고, 사생활 존중할 거고, 애는 낳지 않을 거다 기타 등등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 남들처럼 살고 있는 지금, 팔자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떠올린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결혼 생활을 지탱하는 중추 같은 단어가 됐다. 그래,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나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일들은 모두 다 팔자야.


팔자란 무엇인가? 한평생을 좌우하는 운명이자 소소한 운수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배우자가 원망스러울 때, 등에 달라붙은 아이가 마치 악귀 같다고 느낄 때, 타고난 재능이나 매력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팔자를 떠올린다.


이게 다 팔자야. 이 구멍에서 저 구멍으로 들락날락거리는 생쥐처럼 조급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팔자야. 작은 것이라도 해내면 인정받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며 상대 눈치를 살피는 게 내 팔자야. 배우자가 밉고 싫다가도 쉬이 귀여운 면을 발견해 버리고 마는 게 내 팔자야. 먼저 찌르고 먼저 비는 게 내 팔자야. 육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과, 딱 그만큼의 고통을 상쇄시켜주는 기쁨이 있어 매일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 슬픔과 기쁨이 시소를 타는 일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럴 거야. 이건 내 팔자니까.


그땐 몰랐지. 팔자라는 말이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주는 배우자의 손길만큼 강력한 위안의 힘을 지녔단 걸.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해 버리면, 불평도 억울할 일도 없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하루를 맞이할 힘이 생겨난다.


팔자야,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게 해 주렴.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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