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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Sep 24. 2021

예의 없는 가족

지난주에 아이를 잃어버렸었다. 5분에서 10분 남짓이었는데, 화이자 백신 맞았을 때처럼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부정맥 증세가 도지며 겨드랑이가 다 젖을 정도로 땀이 났다. 망했다, 큰일이다, 끝났다, 죽어야겠다. 극단적인 말이 표어처럼 눈앞을 스쳤다.


어떡해!!!! 어쩌면 좋아!!! 미친 여자처럼 길에서 스카이콩콩을 뛰었다. "하은아!!!" "엄마!!" 아이와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매일 오가는 거리인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사건을 재구상해 보여주는 화면 속 한 장면 같았다. 문방구, 슈퍼, 맞은편 식당, 골목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단골 치킨집에 주문해놓고 기다리다가, 사장님이 치킨 다 됐다고 손짓하셔서 엄마한테 잠깐 아이 맡기고 치킨집 가서 계산하고 온 게 전부였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계셨고, 나와 1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치킨을 들고 나와보니 엄마도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에잉? 바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아 맞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계셔서 엄마 가방이 내 손에 있었다. 엄마 핸드폰은 엄마 가방 안에 있었다. 엄마 가방 안에서 엄마 핸드폰이 울렸다.


애랑 같이 있는 사람과 연락이 안 된다? 긴장과 불안이 메뚜기떼의 습격처럼 와다다 달겨든다. 망했다는 시그널이 울린다. 망했다, 망했어! 연락이 안 돼! 망했어! 이때부터 미친년 1단계에 진입한다. 살면서 보아온 온갖 유괴와 실종, 아동 범죄 콘텐츠가 내 뉴런을 자극한다. 미치겠다.


아 맞다, 아빠가 여기로 오시는 중이었지. 다행히 뇌가 움직여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전화를 받으면, 아빠는 애가 어딨는지 알겠지? 그런데 아빠가 전화를 안 받는다! 잠깐 침착해. 이런 일은 일상이야.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전화를 건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 안 받는다. 이럴 때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칼을 간다. 일단 전화를 제발 받았으면 좋겠고, 전화를 받으면 폭풍 짜증과 울분을 토해내리라. 아니 왜 아이랑 만나기로 한 이 중요한 도킹 순간에 전화를 안 받어? 전화를? 전화를 쫌! 제발!!!!!!!!!!!!!!


빚 독촉하는 사채꾼처럼 계속 통화 연결을 시도했다. 열 두 번쯤 걸었을까. 아빠가 전화를 받으셨다. 급하고 민망한 목소리였다.  


"미안 미안! 시끄러워서 전화 온 줄 몰랐네! 여기 횟집 앞인데 하은이랑 있어!"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애랑 있다고? 애가 거기 있다고? 그럼 됐다. 난 망하지 않았다. 난 애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망하지 않았다. 물론 죽지도 않을 거다. 살았다.


내 가방, 엄마 가방, 후라이드 / 양념 / 간장으로 분리된 치킨 봉다리 3개를 들고 ( 후라이드반 간장반 시켰는데 그날따라 사장님이 실수로 양념을 먼저 묻히시는 바람에 봉다리가 3개가 됐다) 아빠 엄마 그리고 하은이가 있다는 횟집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치킨집과 정반대 방향이었다(집으로 가는 길이긴 했다). 땀이 나서 축축해진 겨드랑이가 바람에 시원해졌다. 이제 엄마 아빠에게 폭풍 짜증과 울분을 토해내리라. 나를 이렇게 미친년처럼 날뛰게 만들다니. 내게 말도 없이 횟집 쪽으로 가버린 엄마와, 열두 번의 전화를 대차게 씹어버린 아빠에게 나는 사자후를 날리리라.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아??????????????????????


예의상 쓰는 존댓말 따윈 개나 줘버려. 사실 5 전까지만 해도 쌍욕튀어나올  같았다. 씨발  전화를  받냐고!!!!


미쳤네, 정말 미쳤네. 애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순간, 나는 누구보다 예의 없는 가족이 되어 있었다.



+) 엄마 아빠 죄송해요...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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